*전력 60분!
*어린 시절이 나옵니다! (동인 설정 있음)
여름은 어린 그에게 상냥하지 못한 계절이었다. 하긴, 사계절 중 그 어느 것도 그에게 적합하지 못했다. 봄에는 꽃이 아름다웠고, 여름은 잎사귀가 푸르렀고, 가을은 창밖이 너무도 울긋불긋 화사했고, 겨울은 눈이 내려 세상을 하얗게 덮씌웠다. 이 세상은 아름답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다.
어린 텐쇼인 에이치는 인공적으로 조성된 5번째 계절만 알았다. 병든 몸이 금방 삭지 않도록. 오래 보관하기 위해 적합한 습도와 기온을 유지한 하얀 곽이 그의 세상이었다. 들리는 사람마다 그의 병실이 특별히 쾌적하고, 어린 예비 제왕을 위해 너무나 완벽하게 조성되어 있다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텐쇼인으로서는 그 말이 진짜인지 알 수 없었다. 애초에 반대편 저울의 추의 상태를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에 비교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배운대로, 그런가요, 하고 예의바르게 웃는 게 다였다.
물론 몸이 좋을 때라면 며칠이고 몇 주일이고 퇴원하기도 했지만, 완벽하게 빠져나가는 건 무리였다. 주의해야할 사항만 손가락으로 세어도 한 손으로는 금방 모자라게 되었다. 처음부터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에 가깝다. 제한이 많은 삶이란 살아본 자만 알 수 있다. 같이 살덩어리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서 다 같은 건 아니었다. 이게 천생 탓이라고 한다면 하늘을 원망하면 될 노릇이었을까. 아직 어린 아이에겐 주위 사람과 신과 운명이 멀었다. 삼키기엔 속이 상했고, 인정하지 않기엔 현실이었다.
태어나길 섬세한 몸으로 태어났다. 꿀을 발라 예쁘게 코팅해둔 사과처럼. 겉만 멀쩡하고 속으로만 나날이 우그러드는 소리가 났다. 어른들은 그것이 후계자로서 정돈되어가고 있다고 했지만, 에이치가 느끼기엔 그냥 죽어가는 과정에 불과했다.
"…오늘은……."
마음 같은 게 거울에 비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랬다면 제 그림자는 우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게 모두에게 들킬 게 뻔했으니까. 그저 베개에 머리를 대고 쌕쌕 눈 감기만 하면 되었다.
사실, 원망이나 질투같은 것도 어느 정도 체력이 남아 있어야 하는 거였다. 남은 건 그냥, 체념과 한숨 비슷한 것 뿐이었다. 잘 만들어진 약은 혀를 둔하게 했고, 꽂힌 바늘로 통해 몸에 스며드는 약은 꾸준히도 뚝뚝 흘렀다.
평등하지 않아.
기쁘지 않아.
이건 무리잖아. 억지야.
밉다고 말해보기도 했다. 창 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이 싫다는 말도. 해보긴 했다. 그럴 때 마다 약에 취해 웅얼거리는 말인 것처럼 모두가 듣고 넘겼다. 병자는 가련해야 했지 악에 받쳐 주위를 공격해선 안된다는 것 처럼.
"…와줬구나. 케이토."
제 어린 친구의 옆모습은 그냥 물로 씻어 놓아둔 자두처럼 깔끔하고 보기에 좋았다. 어린 텐쇼인이 그를 가까이 하는 이유는, 그가 밖의 다른 아이들처럼 경망스럽지 않았고, 자신을 특별하게도 가련하게도 보지 않았으며, 손 끝이 단정하고 깨끗한 향 냄새가 나기 때문이었다. 잠시 스치는 손에 베일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나중에 제가 걷게 될 길에 이 아이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나름은 즐거웠다.
"저번에 안 온건 왜야?"
"아. 장례가 있었다."
"어떤?"
"병실에서 말해봐야 좋을 것 없는 일인데."
"그러지 말구."
"젊은 부인. 30 대…쯤 되었을까."
"아하하. 그래? 그 나이가 젊은, 이라 불리는구나. 내가 죽으면 어린, 이라는 말이 붙을까."
케이토는 흔히, 못할 말도 해버리는 타입이었다. 아니면 자신에게만 이러는 걸까. 우린 이런 점에서 서로를 특별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죽음을 즐겁게 말할 수 있는 어린 아이는 이 세상에 흔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겠지."
우리의 대화는 남들과는 다르다. 그것만이 자랑이었다. 억지라도 해도 상관없었다. 케이토도 상관없어 했다. 그것이 에이치의 비위에 맞았다.
"케이토."
"뭐냐."
"지금은 어느 계절이야?"
"여름이다. 병실은 늘 시원하니까 모를 수도 있겠지만. 창 밖을 봐. 꽤 푸르지."
이번에도 그에게 상냥하지 못한 계절이었다.
아이들은 꿈을 논하기 마련인데, 우리들은 늘 끝만 논했다. 에이치가 길게 숨을 뱉으며 눈을 감았다.
"…그러네. 아이 둘이 숨기엔 좋은 수풀들이 많이 보여."
"? 뭐…. 이 곳의 정원은 꽤 잘 가꾸어져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응. 여름이랑 잘 어울려."
커서 이렇게 되고 싶다, 는 생각은 너무 멀게 느껴졌다. 텐쇼인 가의 사내가 이뤄지지 못할 것을 허무하게 쥐고 있는 것도 우스웠다. 그렇다고 매일 내일, 내일만을 생각하는 것도 서러웠다.
아, 뭘 해도 끔찍한 5번째 계절 속에서.
"하고 싶은 게 생겼어."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갇힐 걸 알면서도.
"…뭔데?"
케이토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병원 침대 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기분 전환을 하라는지 창가를 걷은 커튼을 막 걷어준 참이었다. 드러난 녹색이 푸릇하게 일렁였다. 밖은 바람이 부는 모양이었다.
그 소년이 바라는 미래는 평범한 아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구체적이지 못하다. 그럴수록 더 화가 날 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비밀이야."
"그런가……."
"이루게 되면 말해줄게."
"……음. 무리는 안 해도."
"말해줄게."
또 다시 잎사귀가 손을 흔들었다. 상자 안에 갇힌 두 소년을 발견했는지도 모르겠다. 고집스럽게 웃는 에이치를 보던 케이토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 마음대로 해.
ㅡ
"어릴 때는 말야. 금방이라도 죽어버릴 것 같았으니까, 장래희망이라고 생각하려 해도 구체적인 직업같은 게 떠오르지 않았어."
"그런가. 알겠으니 이제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 에이치."
"그냥…단어 그대로. 장래에 하고 싶은 일 목록처럼 생각해둔 게 다였지. 장래 희망이라기엔 억지고 위시 리스트 정도랄까."
"그래. 알겠으니 들어가자."
"후후, 나름 귀염성 있는 아이였을지도 몰라. 난."
"그렇군. 이제 돌아갈까?"
요 근래 티타임에 초대된 손님 중 가장 매너가 나쁜 손님이었다. 마시라고 내놓아준 차에 제대로 입 한 번 대지도 않은 채, 케이토는 재촉만 하며 안경을 고쳐 썼다.
"케이토. 생각보다 예의가 없네. 학교에서 교양으로 가르쳐 주지 않는걸까?"
"다도라면 법도를 분명히 알고 있다 자부하지."
"그러면 내게만 버릇 없게 구는 걸까?"
"너는 때와 상황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이렇게 햇빛 뜨거운 날에 왜 야외에서 티타임을 하겠다고 부득부득 우기는지. 나무 그늘 아래라고 해도 기온은 그게 그거다. 상식선 안에서 행동해달라고."
"…정말이지. 착하게 있으려고 하다가도 꼭 심술이 나게 만든다니깐."
"뭐?"
에이치는 대답 대신 향긋한 차를 입에 머금었다. 잎사귀가 흔들릴 때 마다 사락사락, 하고 누군가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쓰는 소리가 났다. 그늘이 흐물거리며 케이토와 에이치의 볼을 간지럽혔다. 그냥, 오늘도 말하지 않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알았어. 곧 돌아갈 테니까. 이 한 잔만 다 마시면 말이야."
하긴, 남은 여름이라면 아직 며칠 여유가 있었다. 에이치는 녹빛으로 가득한 잎사귀들을 보다가 케이토를 마주 봤다. 둘다 앉아 있기 때문에 눈높이가 비슷했다. 이것이 가진 특별함을, 에이치는 똑똑히 알았다.
이 정원은 여름. 아직 5번째는 되지 않았다.
내게 앞으로 몇 번째든간에 상관없이, 여름이 오면, 어른들은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서,
수풀 속에 숨을거야.
그리고 네게 입 맞출거야.
나는 커서…, 그걸 하고 싶어. 갈 때는 내 두 발로 걸어서 가고, 두 발로 돌아오고, 내 의지로 그럴거야.
케이토가 영 불편한 눈으로 보다가 끝내 앞에 놓인 찻잔을 입에 대었다. 아무런 의심도 없이 향을 맡고 입에 머금는 그 순간이었다.
……에이치가 비밀처럼 몰래, 컵을 이로 살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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