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힘든 계절이지만 연성적으로는 되게 되게 좋아해요. 겨울만큼이나!
여름의 한낮은 다른 계절보다도 뜨겁고 오래 남았다. 잘못 헛디뎠다간 자국 하나 남길 것 없이 타버릴 것 같은 열기를 품은 시간이었다. …올해의 여름은 작년보다도 더 덥다는 뉴스는 매년 반복되어서, 이젠 특별한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세상에도 의지가 있어서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을 때 마다 점점 거리를 벌리고 있기라도 하는걸까, 싶었다.
"……."
한동안은 이 무더위가 이어질 예정입니다. 모두 조심하시고……, 기타 등등.
어떻게 보면 상투적인 아나운서의 말을 잠자코 듣던 마오가 곤란한 듯 소파에 더 깊게 등을 묻었다. 여름은 밤이 짧아지는 계절이었다. 개인의 취향을 따지면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자꾸 머릿속엔 다른 누군가의 생각이 떠올랐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괜한 걱정만 앞서는 건 어쩔 수 없는 천성인 모양이었다.
햇살이 쨍해질 수록 그늘은 짙어지지만, 바짝 탄 땅에서부터 올라오는 열기가 힘들까봐 걱정이다. 자주 몸을 눕히며 숨을 가지런히 쉬던 그에겐 좀 고된 시기가 될지도 모르겠다. 대신, 별이 예쁜 계절이라 말해주면,
"으음. 내가 생각해서 될 게 아니긴 한데……."
…그런다고 해봐야 그게 제 소꿉친구의 위로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애초에 왜 이런 걸 내가 고민하는지도 모르겠고. 그치?
ㅡ
구슬려 보기도 하고, 화내는 척도 해보기도 하고. 힘들어 하는 걸 보니 그냥 쉬게 놔둘까 하는 마음도 꾹 참고 거의 반 업다시피 교실까지 들어왔다. 자리에 앉히자 마자 리츠는 녹아서 흘러내리듯 으으응, 하며 책상에 엎드렸다. 평소에도 동작이 고양이를 닮았지만, 요즘더러 점점 더 물렁해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살짝 구부러진 등이 쌔액쌔액, 오르락 내리락했다.
기록적인 더위.
슬슬 비가 와 주지 않으려나, 같은 생각을 하며 마오의 손이 리츠의 등을 어설프게 쓸었다. 제 나름대로의, 달래는 동작이기도 했고 사과하는 의미이기도 했다. 영차영차 기어오는 그 사이에 열기를 먹었는지 리츠의 등이 뜨거웠다. 분명 마오의 몸도 그렇겠지만서도.
"더워. 끔찍해…. 죽어버릴거야……. 이건 살인 행위야, 경찰을 불러……."
"아니, 좀 죽을만치 덥긴 하지만 진짜 죽진 않을거니까."
"뜨거워……. 훌쩍, 결국 끌고오다니. 마ㅡ군. 너무해……."
"그……. 정말 덥다고 학교를 안 올 생각……이었겠지만, 응. 장하다. 장하다. 애썼어. 조금 있으면 시원해질거야."
마오는 리츠에게 혹여 햇살 한 자락 닿을까봐 한쪽 커텐만 어떻게든 해보려고 막 창가로 다가갔다. 창가에 서자 운동장이 한 눈에 들어왔다. 조금 더 시야를 올려다보니 지나치게 높아 보이는 하늘이 유독 새파란 색이었다. 매일 보는 하늘이었지만 오늘은 조금 특별한 느낌이었다. 아침이라 아직 한낮처럼 햇빛이 쨍하니 아프지도 않았고, 흰 구름이 몇 조각 동실 떠있는 것들이 모양도 꽤 보기 그럴싸해서, 마오는 무심코 리츠의 이름을 부르려 했다. 리츠, 이것 봐, 오늘 하늘 예쁘지 않아? 하고.
그러니까, 부를 뻔 했다.
조금 밝은 표정으로 리, 하고 겨우 막 입에 담은 발음을 제 뱉어내기도 전에, 커튼 자락을 한 손으로만 쥐고 마오는 고개를 살짝 뒤로 돌린 그대로 멈췄다. 돌아본 시야 속의 리츠는 여전히 둥그렇게 등을 굽히고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이런 얘기 해도 별로 기쁘지 않겠지. 나도 참. 어린애도 아닌데.
"……."
리츠가 밤에 친하다는 것에 대해선 그리 불만이 있지는 않았다. 개인마다 다른 취향과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 리츠는 그저 그늘진 곳을 더 좋아할 뿐이었다.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가끔, 이런 소소한 것들을 공유할 수 없다는 것이 괜스레 신경쓰이고 마는 것이다. 여름 하늘 같은 것. 한 낮에 반짝이는 햇빛이 얼마나 눈부신지, 라든가. 어떤 아이들은 점심 시간에 운동장에 나가 둘이서 빙빙 걸으면서 비밀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뭐, 그 외에도 이것저것…….
…….
"……. …뭐야. 마ㅡ군? 아까 뭔가 내 이름 부르려 하지 않았어~…?"
"응? 아하하, 아냐. 아냐! 잘못 들은거야. 신경쓰지마!"
……역시 얘기하지 말자. 나도 참, 아무 말이나 하려해서 큰일이야. 어차피 이건 리츠가 좋아할 만한 화제도 아닌 것 같고, 지금 기분도 별로일거고. 마오는 잠시 반짝거리는 황금색 모래 따위를 보다가 커튼을 쳤다. 누가 다시 커튼을 걷지 않는 한, 이제 이 창으로는 햇빛이 들어오지 않을 거였다.
ㅡ
여름은 따가운 계절이다. 밤이 짧은 건 특히 불만이었다. 사는 곳을 옮기지 않는 한 내내 불편할 문제라 굳이 입 밖에 내고 다니진 않았지만. 특히나 요 근래엔 텔레비전에서도 소란 피울 정도로의 더위라 그런지, 끔찍할 정도였다. 이런 체질이라는 걸 이제 주위에서도 다 아는지 오늘은 쭉 뻗어 있어도 주위에 이렇다 저렇다하는 잔소리가 적다는 것만이 다행이었다. 수업 시간을 내리 잡아 먹듯이 자고 일어나니 조금은 몸이 풀렸다. 목 말라…. 끄으응, 하고 몸을 일으킨 리츠가 기지개를 폈다. 쉬는 시간인지 반은 어수선했고, 학생들도 몇 있었다가 없었다가 했다. 드르륵,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또 몇 명의 아이들이 들어왔다. 그리고 또 몇 명이 들어오고 나가고.
시끄럽네……. 원래도 그랬지만.
오전의 일은 거의 기억이 남아 있지도 않았다. 리츠는 한 손으로 제 오른 눈을 꾸욱 눌렀다. 마음 같아선 아무나한테도 음료수를 사와달라고 부탁하고 싶지만, 그러기 위해 또 누군가를 불러낼 기운은 없었다. 주위에 인기척은 많은데 홀로 조난당한 게 이런 기분인가, 했다.
불편하고 덥고 시끄럽고.
"아."
쓸데없이 빛나서 어지러워…….
의자에 몸을 기대듯이 뒤로 살짝 젖힌 리츠가 조금이나마 맑아진 머리로 생각에 잠겼다. 오전의 그 장면이었다. 커튼을 한 자락 잡고 자신 쪽을 향해 고개 돌리더니, 제 이름을 채 말하지도 못하고 대충 얼버무리며 다시 고개 돌리던 이사라 마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모르겠지만 다급하게 삼키는 것 까지 다 알아챘다.
아주 잠시지만, 어떤 표정을 했는지도 어쩐지 알 것 같고.
…흐으으음.
꼭 그렇게 제대로 씹지 못한 걸 꿀꺽 꿀꺽 잘도 삼켜대니까 속이 상하는 거 아닐까……. 리츠는 다시 스르륵 무너지듯 책상에 엎드렸다. 손가락으로 톡, 톡. 규칙성있게 두드리며 느릿느릿 움직이던 손가락이 이내 멈췄다.
그냥 기분 탓일까.
ㅡ
…더워.
숨도, 몸 속에서 뛰는 피도, 들뜬 것도 아닌데 조금 빨라져버리는 심장 박동도. 불편하고 갑갑하고. 습해서 옷자락이 들러 붙어오는 것도 기분 좋지 않고. 그런 주제에 매번 매번 찾아와 버리고.
ㅡ
"…어? 왜 굳이 남아서 해야하는데……? 귀찮아서 싫은데……."
"오늘은 내내 잤잖아……. 몇 장만 남은 거, 내가 책임지고 오늘 안에 시키겠다고 약속했으니까 선생님들도 봐주신거라고."
"흐으응……. 마ㅡ군이 대신 써줘도 되는데."
"그럼 의미가 없잖아!? 자, 자, 그러지 말고! 기다려 줄테니까!"
확실히 오늘은 방해가 덜 들어오긴 했지……. 마오가 내민 프린트 몇 장을 받은 리츠가 잠시 자리에 앉아 펜을 들었다.
"옳지, 그거 다 하면 나한테 줘."
"그 오냐 오냐 하는 말투는 좀 그런데……."
"미안합니다! 얼른 하고 돌아가자!"
익명의 앙케이트 비슷한 종류였다. 이름을 쓸 필요도 없었고, 생각하는 항목에만 체크하면 되는거라 금방 끝났다. 지루한 것들을 심드렁하게 해치우듯. 종이를 펜으로 슥, 슥, 하고 긁는 소리만 잠시 교실을 채웠다.
"…끝."
"아. 빨랐네? 고마워."
"응. 이제 돌아가자."
"잠시만~…."
모두에게 신임받는 이사라 마오는 남보다 늘 해야할 게 많았다.
"갯수가 맞는지 확인 좀 하고……."
앙케이트 종이들을 겹쳐서 놓고는 반듯해지도록 탁, 탁, 종이들을 책상에 두드려 맞추는 동작이 가지런했다. 리츠는 잠시 마오의 책상 앞에 서서는 그를 내려다 보았다. 여름을 맞아 학생들의 복장은 조금 더 가벼워졌고, 그건 마오도 마찬가지였다. 어디서 있다 오기라도 한건지, 그 사이 이곳 저곳을 누비기라도 한건지. 드러난 맨 팔꿈치가 살짝 발그스름해져 있었다.
잘 살펴보면 목 부근도 묘하게 붉었다. 혹은 제 눈에만 그리 보이는 걸지도 몰랐다.
지는 노을과는 다른 붉은 색이 곳곳에.
손끝,
목,
귓가.
어쩐지 눈가까지 살짝 발긋해 보였다. 망가지기 쉬운 부드러운 과일을 잘못 쥐어 난 멍은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조금 더, 뜨거워 보였다.
그냥 착각일까? 마ㅡ군의 머리색 때문인걸까? 묘하게 들뜬 열기가 지나간 자리라서, 리츠에게 익숙한 종류는 아니었다. 마치 한 여름의 아침 하늘같은.
그래, 굳이 설명이 없어도 누구나 다 알 법한 얘기. 그것들은 사쿠마 리츠와 가깝지는 않았다. 그게 사실이었지만서도,
"마ㅡ군."
그것이 싫다고는 말 하지 않았어. 사쿠마 리츠는 사실, 이때에서야 지금이 여름이구나. 하고 실감했다. 한 낮이 따갑든 말든, 눈부시든 말든, 덥든 말든. 이사라 마오를 보면 주위가 어떤 때인지 뭐든 알 수 있었기에 다른 것들은 주의 깊게 보지 않아도 되었다.
"어?"
여름은 숨이 막히는 계절이다. 낮이 길고 밤이 짧은 계절. 아주 잠시 눈을 뗐다간 아지랑이처럼 사라질 것 같이 불안하면서도, 금방 무슨 일이든 일어나서 휘말려버릴 것 같은 때였다. 성가시고 번거롭고. 조금만 제 손에 잡혀줄 수 없겠냐하고 절로 불평이 나와버릴 것 같은 종류였다.
하지만 문득, 모든 것이 조금씩 익어가는 때이기도 하다. 내 손에 닿기엔 너무다 나와 다른 것까지 너를 닮았다.
"……."
"…? 읍, ㅡ…"
이사라 마오를 닮은만큼 사쿠마 리츠와는 멀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속성이므로 어쩔 수가 없었다.
아주 잠시 마주 닿은 입술은 조금, 열이 올라 뜨거웠다. 본능적으로 살짝 뒤로 움츠리는 마오를 따라 리츠의 몸도 조금 더 앞으로 숙여졌다. 교실엔 아무도 없었고, 정말로 곧 나갈 생각이었는지 냉방도 꺼져 있었다. …더워. 리츠는 그렇게 생각하며 마오의 열을 조금 나눠 받듯이 삼켜 물었다. 살짝 감은 눈을 뜨자, 방금과는 비교도 안되게 새빨갛게 달아오른 마오의 얼굴이 보였다.
아. 여름이다.
고양이처럼 핥으며, 문득 문득, 누구나 다 알 것을 새삼 머릿속에 새겼다. 금방이라도 건드리면 톡 터질 것 처럼 붉고, 갈증이 나고, 갑갑할 정도로 따뜻했다. 여름은 불편한 계절이야. 솔직히 좋아한다고는 못하지만.
네가 여름을 닮았다면 나는 끝내 그 계절을 싫어하지도 못하게 되는 것이다.
"…아."
"……~"
"허락 먼저 받으려는 거 깜빡했어."
"그걸 지금 말해서 어쩌겠다는거야. 한참 늦었잖아……."
"음, 뭐……. 해버렸으니까 상관없지만."
"태도 불량……."
"…아니면 한 번 더 해도 돼?"
일부러 쿡 찌르듯이 말을 하자 겨우 식은 얼굴이 다시 또 붉어졌다. 쓰,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하고 벌떡 일어나 프린트물을 옆구리에 끼는 마오의 심장소리가 여기까지 들릴 것 같았다. 두근, 두근, 맥박치는 피는 원래도 뜨거웠지만 지금은 또 더 더워져서 맡기 좋은 향이 났다. 어디를 가든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어서 가기나 하자며 옆을 지나치는 마오의 걸음이 재빨랐다. 쿵, 쿵, 하고 바닥을 밟고는 떠나는 동작이 영 어설펐다. 리츠는 손으로 제 입가를 꾹 누르며 눈짓했다.
…그의 뒷목은 아까보다도 훨씬 붉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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