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제대로 한 문단인게 하나도 없었다....
1.
치이익, 하고 달궈진 쇠 냄새가 났다. 두터운 천으로 눈을 꼭 가린 아오바가 몸을 한 번 떨었다. 옷의 주름을 펴는 다리미의 온기도, 화덕 안을 뒤섞으며 정리하는 부지깽이와도 다른 열기였다. 안락하지 못하고 불안한. 뭐든 해칠 것 같은 열기가 바람처럼 제 얼굴에 훅 끼얹어졌다. 등뒤가 서늘해지는데 도움을 청할 곳이 없었다. 아오바. 제 앞에 앉은 큰 누이가 나직하게 이름을 불러왔다. 늘 나비처럼 걷고 백로의 날개짓처럼 말하던 이였다. 미지근한 파도처럼 다정하고 거품처럼 깨어질 것 같던 그녀를, 아오바는 자랑스럽게 모셔왔었다. 아오바는 매일 아침 그녀의 몸단장을 돕는 시동이라 그녀의 가까이에 있었고 그녀에 대해서 뭐든 안다고 내심 뻐기고도 있었다. 왜 그리 그녀가 아침마다 새하얗게 마른 종잇장같은 얼굴로 한숨을 쉬는지, 왜 사내의 얘기를 할 때마다 신경질스럽게 웃는지, 왜 가끔 아무도 모를 시각에 홀로 눈물짓곤 했었는지. 어린 아오바는 어젯밤이 되어서야 겨우 알았전 주제에 말이다.
"아오바. 화상이란 건, 아주 아주 오래 남는 상처란다."
어두워진 시각, 방에 다과상을 올려놓고 돌아가려던 참에 붙잡히어 큰 누이의 문 앞에 무릎꿇고 모든 소리를 다 들었다.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 그리고…축축하게 젖어서 철퍽거리는 기이한 소리. 누이의 우는 듯한 소리가 여직도 잊혀지지 않고 있었다. 꽃이 꺾인다는 의미를 그때서야 알았다. 지옥같은 밤이었다.
"그건 또 매우 아프지."
"…흑."
"얼굴에 닿으면 흉한 꼴로 다녀야 한단다. 다리에 닿으면 평생 절름발이로 살아야 한단다. 이걸 삼키면 평생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게 돼."
"……."
열기가 아까보다 더 가깝게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아오바는 몸을 굳힌채 움직이지 못했다.
"이곳에서 사람에게 정을 준다는 것은,"
누이가 우는 듯 웃었다.
"그것보다 아주 고통스러운 화상이 남는 일이야."
이것이 그가 배운 가르침 중 가장 아픈 것이 되었다. 부들거리기만 하던 마음 속이 지져지는 것 같은 때였다. 살이 타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한참 그렇게 제 얼굴 앞에 얼씬거리던 인두가 치워지며 누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어린 아오바가 꽃 피고 지는 화원에 영문 모른채 지내게 된지도 딱 5년째 되는 날이었다.
2.
다정함이란 열병처럼 지독한 구석이 있었다.
마루에 펼쳐놓은 천자락에 이슬이 스며들어 못 쓰게 되는 것처럼. 가만히 있으면 아무 일 없는 것을 공연히 건드려 일을 내곤 했다. 코우자쿠도 그런 류의 남자였다. 금방 찾아와 다른 곳으로 가버릴 것 같던 그 남자는 이상하게도 아오바의 주위에 얼씬거렸다. 처음엔 자신도 그럭저럭 살갑게 대했으나 매번 매번 아무 일도 없이 손만 만져보거나 제 얼굴을 들여다보며 고운 얼굴이라고 말하는 그에게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다. 돈을 냈으니 아무것도 하기 싫어하는 걸까 싶어서 붉은 기모노 자락에 손을 뻗었더니 그런 게 아니라며 얼굴을 붉히지 않나. 그저 술만 잔에 가득 담는 일만 시켰다.
그는 이곳에서도 반반한 얼굴로 인해 인기있는 편이라, 코우자쿠가 아오바만 찾는다며 불평하는 꽃들도 몇 명 있었다. 사내를 두고 경쟁하는 일엔 관심도 없는 아오바에게 있어선 달갑지도 않은 열정이었다. 살과 살이 닿는 것도 아니고 어린애 소꿉장난 같은 짓거리만 하는 것도 그렇고. 아오바는 그저 그늘진 곳에 쳐박혀 없는 듯 살다가 볼품없이 지고 싶었다. 그래서 그날 밤, 한 이불 덮고 나란히 누운 때에 코우자쿠가 제 기색을 살피며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뭐든 해보라고 재촉할 때에 일부러 웃었는지도 모르겠다.
「당신께서 저를 자주 찾아주시는 게 기뻐서, 제 나름대로 특별한 것을 생각해 보았는데 들어 주시겠습니까?」
당신은 뭐든 바라는대로 들어주겠노라, 고 호언장담했다. 참 어리석은 사내로다 라고 생각했다. 사지 멀쩡한 주제에 부드럽지도, 달콤하지도 않은 남자만을 찾고.
이상한 사람.
이상한……사람.
「이번에 가시고 난 후의 얘기 입니다만. 비가 오는 날에, 붉은 우산을 쓰고 와주시겠어요?」
때는 좀처럼 비가 내리지 않는 늦겨울이었다. 가뭄이라는 소문이 슬슬 돌정도로 하늘 맑고 높아 물기 하나 없는 나날이 이어지고 있었다. 코우자쿠는 잠시 어두운 얼굴을 하다가, 그러마, 하고 웃었다.
3.
그 이후로 코우자쿠의 발길은 뚝 끊겼다. 아오바는 제 말이 용케도 먹혔구나 생각하며 하루 하루를 보냈다. 사람이 있다가도 없는, 그러던 때였다. 시동이 아오바의 옷자락을 끌고 창가 쪽으로 자꾸 재촉하더니 급기야 등을 밀기까지 했다. 어린 아이에게 성을 낼 수가 없어서 난처하게 알았노라고 하고 창가에 가 서보았더니 그것이 보였다.
붉은 우산.
구름 한 점 보이지 않는 푸른 하늘에 붉은 기모노.
잠시 말을 잃고 있을 때에 거짓말처럼 눈이 마주쳤다. 남자가 웃는 것과 동시에 바람이 불어 옆의 벚꽃잎이 비처럼 후두둑 내렸다. 분홍빛의 연한 꽃잎 사이로, 코우자쿠가 무언가 말했다.
정말 지독한 사람이다.
어린 시절 겪었던 달군 쇳덩이같은, 그런 열기.
아오바는 코우자쿠가 뭐라 하는지 입모양을 보고 알았다. 비가 오니 만나러 왔소.
이런 쨍한 날씨에 입만 살아서. 아무것도 모르고.
사람 속내따위 알아 주지도 않고.
못된 사람. 참 못난 사람…….
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미리 놓아둔 물컵에 손도 대지 않고, 불만 있는 아이처럼 테이블만 뚫어지게 노려보던 그가 작게 숨을 내쉬었다. 아오바는 그가 화를 참고 있다는 걸 알았다.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걸 몇 번이고 곱씹고, 참아주고 있었다. 노이즈라는 이름의 제 연인은 이렇게 자상했다. 아마 이 세상에 남은 유일한…아군.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던 노이즈가 신경질적으로 웃었다. 슬쩍 내리뜬 눈이 가늘게 감기며 날카롭게 빛났다. 주위의 공기가 우그러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아오바는 노이즈의 그런 표정을 어딘가에서 본 듯 하면서도, 처음 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당신, 제정신이야?"
웃음기가 섞인 것 같은 허한 목소리였다. 아. 아오바는 몸의 체온이 몇 도는 내려간 듯한 한기에 침을 꿀꺽 삼켰다. 가볍게 혼나는 정도로 끝나지 않을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웃어 넘길만한 일도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한 구석에는, 종이 조각 구기듯 가볍게 넘어가주길 바랐을지도 모른다. 사람이란 이렇게도 미련 덩어리라 소중하게 대해지고 싶다가도 가끔은 그 자신을 위해 나를 버려주길 바랐다. 그냥 한때의 이야기처럼 여겨져도 좋으니까 그런 표정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오바는 머금고 싶지 않은 것을 입에 담은 것 처럼 애매한 표정을 겨우 숨겼다. 방금까지도 초조하게 만지작거리고 있던 티슈가 너덜너덜하게 뜯겨져 있었다.
"…미안."
"미안이라는 말로 될 것 같아?"
"알고, 있어. 자, 그럼. 시간, 이니까…. 가볼게."
"나, 허락한 적 없는데."
"……."
"허락한 적 없다고."
연한 녹빛의 눈이 자신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노이즈는 언제나 솔직하고, 언제나 전력을 다했지. 그런 점을 참 좋아했다.
아, 참 좋아했지.
…정말 좋아했어.
"…화내줘서 고마워."
"말길 못알아 들어?"
"잊지 않을게."
"당신 진짜 멍청이야?"
"잘 지내고……. 괜찮을거야. ……."
"앉아."
"…냉장고에 미리 이것저것 채워놨으니까 챙겨 먹는 거 잊으면 안,"
쾅, 끝내 참지 못하고 노이즈가 테이블을 세게 내려쳤다. 컵에 담긴 물이 찰랑거릴 정도여서, 아오바는 자신도 모르게 멈칫하고 몸을 떨었다. 그가 몸을 일으키자 의자가 뒤로 넘어지며 바닥을 굴렀다. 예상했던 순간이었지만 여전히 아팠다. 아, 제발. 아오바가 무릎 꿇고 빌고싶은 심정으로 노이즈의 시선을 피했다.
"누가 그딴 배려 필요하다고 했어!?"
"…노이,"
"갑자기 그딴 소리하면 내가 '어쩔 수 없네. 그럼 보내줄게', 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해!? 당신은 나를 뭐라고 생각하고 있는거야!?"
"그게, 아니라…."
"지금까지 당신과 지내면서 아무 문제 없었어! 능력도 거의 사라졌다며, 이제와서 뭐야!? 갑자기 그런 말 들어도 결국엔 가능성의 문제잖아!? 그딴 게 뭐?! 연구소가 병원이라도 되는 줄 알아!? 당신이 모르모트 꼴이 되는 걸 보고만 있으라고!?"
"노이즈, 진정하고."
"당신은!!"
당장이라도 주먹을 날릴 것 같던 노이즈가 말을 멈췄다. 아오바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것을 꾹 삼켰다. 눈물이 몰릴 것 같은 때엔, 가슴 한 켠이 묵직하게 내려 앉으며 아래에서 위로 열기가 훅 끼쳤다. 노이즈가 한 걸음 다가서자 아오바가 겁을 내듯 뒤로 물러섰다. 시선을 받을 자신이 없어서 고개를 돌린 아오바가 입술을 깨물었다. 꽉 쥐어잡은 주먹은 이미 핏기 없이 허옇게 질려 있었다.
"…왜 항상 나를,"
"……."
"왜 나만 선택해주지 않는건데……."
"…, ……."
나라고 해서 괜찮을 리가 없잖아.
"나만 선택해주면 나는 세상 모든 걸 다……."
"……."
나도 할 수만 있다면 너랑,
"버릴 수 있는데……."
너랑, 평생을 살고 싶었지…….
아오바는 숨을 다잡았다. 아, 이별의 순간이란 이렇게 끔찍한 거였구나. 차라리 칼로 도려내지고 싶었다. 저편에서 문이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이제 헤어질 시간이에요, 도련님. 그동안 행복했어요.
"…잘 지내, 노이즈."
노이즈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오바는 뒤돌아 서며 서럽게 웃었다. 그래도 너는 하나 모르는 게 있다. 나도 세상따위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내 능력이 넘쳐 흘러서 그걸로 다른 사람이 망가지든 말든 내 알바 아니야. 아주 슬프겠지만, 아주 미안한 말이지만, 아주 지독하고, 못된 말이지만. 나는 너만을 걱정하고 너만이 안전하길 바랐다.
나는 너만이 행복할 수 있다면 너와도 헤어질 수 있다.
문고리를 잡고 여는 순간이었다. 아오바는 이왕 이렇게 된 거, 세상에서 제일 위험한 사람이 되어버린 김에 세상에서 제일 해서는 안될 짓을 하기로 했다. 살짝 뒤돌면서 아오바가 웃었다.
"사랑해."
다정하기만 하는 그 말에 크게 베여 피가 흘렀다. 누구의 피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 방을 가득 메우고도 남을 비린내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너덜거리는 살점이 바닥에 떨어져 구르는 참담한 풍경을 뒤로 한채, 아오바는 방을 걸어 나갔다. 발걸음 하나가 무거워서, 금방이라도 아이처럼 몸을 웅크리고 울어버릴 것만 같았다.
잘 생각해보자. 보통 달 거 제대로 다 달린 채로 태어난 남성이 나풀거리는 치마나 헤어 드레스를 착용하고 팔랑팔랑 걸어다닐 확률이 어떻게 된다고 생각하는가? 물론 변수야 많겠지만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상황. 그 남성에게는 도착증도 여장 취미도 없는 절대적 바지 취향이라는 전제하에서 보도록 하자. 그래 번개가 무지개 빛으로 번쩍 거릴만한 확률로 있다고 할 수는 있겠지. 물론 그것보다 높을 수는 있겠지만 내게는 그 정도로 심각하단 말이지. 그러니까 평생 한 번 있을까 말까한 그런 때에, 심지어 '이런 일'까지 겹칠 수 있냐는 말이지?
아니, 물론 도착증 환자분이나 여장 취미를 즐기시는 전세계의 남성분을 적으로 돌릴만한 생각은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저의 경우로, 네. 지금은 특히나 눈물 쏙 빠질 정도로 절절한 사연의 구렁텅이 속에 있는 고로 선처 베푸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세라가키 아오바. 신체 건장한 23세의 남성. 그러니까 현재 저는,
"야, 거기 꼼짝 말고 있어!"
"수근거리지 마! 이게 장난처럼 보여!?"
"자, 잘못했어요! 살려주세요!"
"……으아아……."
양손 다 뒤로 꺾여 손목이 묶인 채로 인질들의 틈 안에서 무릎 꿇려 있습니다. 그나마 뒤에서 씌워주신 검은 천봉투 덕에 얼굴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에 무한한 감사를 느끼고 있습니다……. 아니, 이 훤한 대낮부터 멀쩡한 쇼핑 매장을 점령하는 짓은 올바르지 못하긴 하지요. 진짜로. 아니 그렇게 이 세상과 맞서 싸우고 싶으면 번지 점프같은 건전한 취미가 있지 않습니까. 그것조차 미적지근해졌다면 줄 없이 뛰어 들어 버리라고!
[아ㅡ아! 보고있냐! 우리들은 스크래치다!"]
[야, 화면 잘 보라고!]
"…들떠서 바보짓 하지 마라."
[헙, 넵, 죄송합니다. 밍크 씨. 어, 아직 마이크는 안 켜진 상황이니까 방송되진 않고 있습니다. 네…….]
"내놔."
[예, 예…….]
물론 제가 왜 이런 곳에서 미니 메이드복을 입고 있는 것에 의문을 표하실 분도 계실지도 있겠습니다. 그, 아시겠지만 성인이 되면 금전 문제라는게……. 고작 하루, 그것도 몇 시간만 참고 피켓 들고 서있기만 하면 뼈빠지게 이주일 고생한 분만큼의 수익이 있다면 당당하게 있는 자신의 셋째도 숨길 수 있게 된다고 해야하나. 닳고 닳았다고 하지는 말아주세요. 이 부분의 사항은 반 강제적인 상황이기도 했어요…….
"슬슬 준비해."
짜증스럽게 툭 던지는 이 저음의 목소리가 그들의 보스인 것 같습니다. 자기들끼리 신나서 낄낄거리던 웃음 소리들이 잦아들고 공기가 무겁게 내려 앉았습니다. 뚜벅뚜벅, 거리는 구두 소리가 근처에서 얼씬거렸습니다. 털 뽑힌 닭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자니 긴장감에 찔려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제 옆에 있던 여성이 작게 흐느끼고 있었습니다. 음, 어쩐지 측은한 마음이 들었습니다.(이래 보여도 저는 달릴 거 다 달린 23세 사내니까요) 저는 제 몸으로 조금이나마 그녀를 가려주려고 어깨를 조금 들었습니다. 구두 소리가 멀리 떨어진 줄 알았기 때문에 괜찮겠거니 싶었는데 그게 오히려 사나운 매 앞에서 춤추는 토끼 꼴이었어요.
"……?"
왜 이렇게 조용하지…? 하고 여긴 순간 누군가가 제 어깨를 잡고 일으켜 세웠습니다. 오우와아악어억와악 하는 소리가 날 것 같은 걸 꼭 참고 비틀거리고 서자 누군가가 저를 당겨 곁에 가까이 세웠습니다. 가죽이 스치는 듯한 단단한 감촉이 제 어깨를 단단하게 잡았습니다. 확 다가온 열기에 저는 숨쉬는 것 조차 잊었습니다. 설마. 아니겠지요.
"에, 인질을…… 그, 그 분으로 하시게요? 밍크 씨?"
"이곳의 아르바이트 생이라도 되는 거겠지. 보여지는 거라면 화려한 편이 좋을거고. 이런 아르바이트를 하려면 어린 나이일 게 뻔하잖아. 자극하려면 약하고 어린 걸 보이는 게 나아."
"오오오!! 역시 밍크 씨입니다!!! 대단하십니다!!"
"아, 그……."
"그냥 보이는 용이다. 바로 해칠 생각은 없어. …아직까지는 말이다."
"그게……."
"밍크 씨! 카메라 준비 오케이 입니다!"
잠깐만 잠깐만 잠깐만
"얌전히 있는 게 좋을거야. 여러가지 의미에서."
당장이라도 몸을 뒤틀며 달아나려 몸을 긴장시키고 있던 때에, 귓가에 들리는 남자의 목소리에 저는 어깨를 움츠렸습니다. 제 등에 닿고 있는 게 어떤 건지 잘 모르겠지만 나이프 같은, 그런…류가 아니었을까요. 아, 저 제대로 위험한 것 같은데요. 그나저나 카메라는 왜…? 설마…. 에이 설마 설마 설마 아니겠지 에이 야 설마 아니 왜 이렇게 아니 왜 저요 저기 저기 잠시만 NG N
"자."
"……."
"이 영상을 보고 있다면 알겠지만 우리는 이 숍을 막 점령한 참이다. 허수아비 같은 경찰 나으리. 쓸데 없는 짓을 하려 한다면……"
"……~~"
"협상 결렬이다."
극적으로 벗겨지는 검은 봉투에 쓰고 있던 흰 레이스의 헤드 드레스가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반짝거리는 조명과 깨끗하고 깔끔한 숍의 바닥, 주위엔 온통 사납게 보이는 사내들, 그리고 제 앞에는 카메라의 렌즈가 보이고 있었다. 저, 이거 혹시 미도리지마 전체로 보내지는 영상인가요……?
"……."
"……."
"……."
이쪽을 보고 있던 누군가가 마이크를 떨어뜨려 귀가 찢어지듯 이이잉하고 울리는 소리가 났는데도 아무도 웃거나 그를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있을 수 없는 걸 본 사람들처럼 이쪽을 보고 있었지요. 그렇겠죠. 저라도 그랬을 겁니다. 제 한쪽 어깨를 꾹 붙들고 있는 사내 또한 말이 없었는데, 자신보다 훨씬 체격이 좋은 그의 얼굴을 볼 자신도 없었고 그럴 수도 없었습니다. 꽉 묶인 손목을 애처롭게 움직여보던 저는 울고 싶어졌습니다. 아, 정말 죽고 싶다…….
할머니, 정말 죄송합니다. 다음 생에는 제대로 태어나서 효도하도록 할게요. 오늘도 할머니의 손자는 열심히 살고 있었습니다…….
1.
세이는 처음 외출 허락을 받은 도련님처럼 들뜬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사실 그 표현 그대로이긴 하지. 일부러 클래식한 외관의 기차를 고른 것도 나름 세이에 대한 배려였다. 덜컹거릴지언정 아주 느리게 움직여서 밖의 풍경을 보기엔 이만한 게 없었다. 바이러스는 트립에게 이런 관광용 기차가 존재하는 것 자체가 과거에 대한 향수에 젖어서 돈 낭비와 시간 낭비를 일삼는 호사로운 취미 생활이라 평했었는데, 세이의 앞에서는 시치미 뚝 떼듯 웃으면서 멋지네요. 하고 짧게 말했을 뿐이었다.
마악 햇빛이 눈부시게 쏟아져 올 때인지라 커텐을 내려 가리고 있었다. 그럴 필요 없다는데도 한사코 두 무릎을 꾹 붙이고 얌전히 앉아 있던 세이가 자꾸만 창가 쪽을 힐끔거렸다.
"보고 싶으시면 보셔도 상관은 없습니다만."
"응? 아, …눈부셔서, 싫을까……싶어서."
"햇빛을 쐬는 게 몸에 나쁜 것도 아니니까요. 괜찮습니다."
"음……."
아까보다는 얼굴 표정이 밝아졌지만 여전히 행동에 옮기지 못하고 있었다. 뭐,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도 일일이 보고되어지는 곳에서 일평생 살았으니 당연한 건가. 바이러스가 손을 뻗어 커튼을 걷었다. 환하게 내리 쬐이는 빛에 그의 금발이 한층 더 밝게 보였다. 세이는 깜짝 놀라 몸을 굳히면서도 그 모든 것을 하나도 놓치기 아깝다는 듯 동그래진 눈으로 계속, 계속 쳐다봤다.
"바이러스는, 하얗구나."
"…? 그런가요?"
"응."
세이가 짧게 웃었다.
"예쁜 사람이야."
2.
그러고 싶다는 의사 표현을 듣자마자, 바이러스는 코일로 트립에게 통화를 걸었다. 깜짝 놀라는 세이에게는 아랑곳하지 않고 기차역 도시락 두 개를 주문한 바이러스가 짧게 통화를 끝냈다. 정말 용건뿐인 내용으로, 세이가 어쩔 줄 몰라하자 그는 다정하게 웃어 보였다.
"저도 먹어보고 싶었거든요."
평생 관심도 취미도 없었던 것이 순식간에 대단한 것 처럼 바꿔 말하며, 바이러스는 세이를 안심시켰다. 물론 바이러스 입장에서 볼때 기차역 도시락 따위는 먼지 묻은 것 처럼 불청결해보이고 질도 따질 수 없는 그런 음식에 불과했다.
뭐, 어떻게 생각하든 뭐가 중요하겠습니까마는.
이래도 괜찮은건가 고민되는 듯 우물거리던 세이가 끝내는 고마워, 라고 대답했다. 바이러스는 천만에요, 하며 다시 의자에 푹 기대 앉았다. 적어도 이 곳의 의자가 푹신한 것만은 참 마음에 들었다.
3.
세이는, 이제 망가진지 오래라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영상으로 보이는 가짜라는 것 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트립은 언제까지 이걸 해야하는거냐고 물었다.
글쎄, 세이 씨가 질릴 때 까지?
혹은 버티지 못하실 때 까지.
트립이 사다준 기차역 도시락을 앞에 둔 세이가 새근 새근 잠들어 있었다. 다시 일어날 때엔 처음부터 또 설명을 해야 할 것이다. 그는 이제 하루의 기억도 담지 못하게 되었다. 일정량이 넘어버리면 견디지 못하고 잠들어 버리고, 깨어나면 모든 걸 잊어버린다. 기차 여행이에요, 하고 말하면 세이는 처음처럼 기뻐하겠지. 하루종일 내내 기뻐하는 것도 몸에 부담이 가지 않으려나 걱정되긴 했다.
토우에에게 있어 세이는 소중한 인물인건 분명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런 번거로운 짓 따위 허락했을 리가 없지. 하루종일 그들은 같은 곳에 앉아 흘러가는 영상을 보며 기차 여행이라며 떠들어 댔다. 가끔 들리는 다른 승객들의 목소리는 녹음본이거나 연구소의 사람들이었다. 이런 걸 겪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 들뜬 세이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막 식사하자며 젓가락을 들 찰나에 잠들어 버리셨으니, 다음에 깨어날 때엔 식사하시도록 서둘러야겠다. 아마 잠에서 깨어나면 공복을 느꼈었다는 사실조차 잊으셨을테니까.
"교대할까?"
막 도시락 뚜껑을 열고 계란말이를 집어 먹으며, 바이러스가 고개를 저었다. 약속은 약속이니까. 그러고는 다시 뚜껑을 닫는다.
'Dmmd' 카테고리의 다른 글
[코우아오] 버릇 (0) | 2015.03.23 |
---|---|
(고어주의)[렌아오] 좋아해, 좋아해. (0) | 2015.03.21 |
[렌아오] 마음행방 (0) | 2015.02.27 |
[우이토리] A beautiful death (0) | 2015.02.23 |
[클리아오] 모든 사랑은 천국에서 이뤄진다. (2) | 2015.02.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