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이토리] A beautiful death
*우이토리 리커넥트 루트 플레이 완료한 것+바이러스 생일 축하글
*본편, 리커넥트 네타 포함.
*바이러스 오빠 생일 축하해!!!!!! 좋아해!!!!!! 오빠아아!!!!!! (털썩)(빠순이 하나 있음)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게 존귀하며 존중받아야 할 존재라고들 하지만, 현실에서 무조건 통용되리라는 법은 없다. 재능의 유무, 혹은 여러가지 이유로 인해, 태어나는 것들에게 부여되는 가치란 저마다 달랐다.
그렇게 하나 하나 따져가다보면 알 수 있었다. 자신은 태어났을 당시엔 그리 필요로 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러니 태어난 곳에 있을 수가 없었다. 버려지듯 이리저리 휩쓸리다가, 겨우 빨려들어간 곳이 나락이었다. 토우에가 하고자 하는 계획에 필요한 재료 리스트에 제 이름이 있었다. 새하얗게 눈이 멀 것 같은 곳에 박혀서,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써야 했다.
물론 그것에 절망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런 감정 소모는 해봐야 체력의 낭비와 이어진다는 것과 알았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토우에의 연구소 외의 삶을 살아본 때의 기억은 아주 흐릿했고, 구겨 버릴 수 있는 쓰레기처럼 별 감흥도 없는 순간이 대부분이었다.
ㅡ 자신과 마주치기 전의 트립은 막무가내로 성을 내는 새끼 짐승같았다. 보이는 것마다 공격했고, 그것으로 자신이 다쳐도 상관없어 했다. 자신과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는 녀석이라고 판단했는데 왜 이리 집요하게 제 뒤를 따라오는지 알 수 없었다. 어른들에게라면 몰라, 아이들. 그것도 자기보다 어린 것들에게 상냥하게 대한 적 따위 한 번도 없었기에 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옆으로 자리를 비킨 바이러스가 중얼거리며 안경을 고쳐썼다. 두 손을 주머니에 다 꽂아놓은 채로 비스듬히 선 트립이 눈을 데록 굴렸다. 딱히 심술을 부리는 태도는 아니었다. 시끄럽게 하면 곤란해, 하고 말하려던 것도 그만뒀다. 그는 조용히 있을 거라는 걸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언제부터인가 그렇게 고정된 것 처럼 행동하는 것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트립이 바이러스의 행동을 예측했듯, 이제 바이러스도 그것이 가능했다. 어쩌면 태어난 이후 처음으로 엮어보는 매듭 고리였을지도 모르겠다. 바라본 적 없는 순간인지라 기쁘지는 않았다. ㅡ 아이들 사이에 있다가 불려나와 어른들에게 이끌려 갈 때였다. 바이러스는 자신을 뚫어져라보는 누군가의 시선을 느꼈다. 살의도 동정도 아니었고, 정말로 순수하게 보고만 있는 시선. 바이러스는 그쪽으로 눈길 하나 주지 않은 채 어른들의 뒤를 따라 걸었다. ㅡ "바이러스." "허락받았을 리가 없는데 어떻게 들어온거야?" 트립이 바이러스의 손끝을 툭툭 건드렸다. 링겔 바늘을 꽂고 있는 쪽이다. 정체 모를 액체가 위에서 아래로 똑, 떨어지는 것을 눈으로 쫓으며 트립이 속삭였다. 그리고 뭘 생각했냐면, ……. "…아!" …하하, 봤다. 그 와중에도 한없이 즐겁게 흥얼거리는 목소리가 아주 멀리 있는 것처럼 들려왔다. 어른들이 트립을 나무라는 소리, 발소리, 소란스럽게 정리하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솜으로 제 손등을 톡톡 두드리더니 다시 바늘을 꽂아 넣었다. 그리고 다시 붕대를 고쳐 다듬어줄 때에, 다른 누군가가 비어있는 팔을 붙들고 소매를 걷었다. 드러난 팔에 또 다른 주사 바늘이 꽂혔다. 서둘러 눈을 감았지만 눈거풀이 부들부들 떨리고 뜨거웠다. 잘 달군 무언가가 눈 위를 지근히 누르는 것 같았다. 다시 시야가 어두워져도 한동안은 계속 시뻘겋게 보였다. 아프게 이불을 꾹 구겨 쥐는 순간, 스스로 직감했다. 이것으로 내겐 눈이 두 개 더 생겼구나, 하는. 그러니까, 아주 조금, 이후, 트립도 선별되었다는 얘기가 들렸다. 아마 자신의 시력이 나중에 내려가면 기껏 갈아 끼운 눈이 제대로 못 쓰일까봐 스페어처럼 하나 더 마련해 두는 것 같았다. 물론,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으니 혼자 멋대로 생각하는 것 뿐이긴 했다. 어쨌건 뭐든 상관없었다. 제 눈은 그 이후로도 순조롭게 회복해서 앞만 쌩쌩하게 잘 보고 있었고. 바이러스는 예전의 트립처럼 침대에 엎드리듯 기대고는, 예전의 자신처럼 눈에 붕대를 꽁꽁 감싼 트립의 볼을 손가락으로 꼭 찍었다. 소년은 바이러스의 눈과 똑같은 눈색을 골랐다고 했다. 다른 색의 눈을 한 제 얼굴은 보지도 않았다 한다. "이거 아파." 짧게 투덜거리는 소년을 보며 바이러스가 살짝 웃었다. 최근엔 웃는 법에 열중하는 중이었다. 곧 사람들 사이에 투입되거나, 혹은 무언가를 관리하는 일에 불려갈 것 같으니 이 정도는 미리 해두는 편이 나았다. 바이러스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느끼는 호불호를 민감하게 가려낼 줄 알았다. "숨쉬는 것, 그리고 손을 움켜쥐는 동작까지도. 그 흐름이 보이게 될거야." "상상이 잘 안가는걸." "곧 알게 돼." 트립은 제 볼을 슥슥 긁다가 손을 내렸다. "기분 좋아?" "아니." 흐트러진 이불을 바로 다듬어주며 바이러스가 무심하게 대답했다. "인간이 벌레같이 보여." 흐응, 생각하는 듯 머리를 기울이던 트립이 양 어깨를 으쓱거렸다. "자, 별 달라지는 건 없다는 소리네." "…그렇지." "시시하네." "응." 바이러스는 일어나서 침대 옆에 놓여진 테이블로 갔다. 물병과 물컵, 그리고 자신이 방에 들어올 때부터 몰래 숨겨온 포크가 있었다. 손으로 포크를 집어 들었다. 뭔가를 찍어 먹기 위해서 있는 것이라도 사용하는 것에 따라 충분히 흉기가 될 수 있었다. 그것을, 단검이라도 쥐듯 잡고는 트립을 보았다. 새하얀 방에 흰 붕대, 트립의 인상이 조금 더 어려 보이는 것 같았다. 소독약 냄새. 무방비하게 놓여있는 두 손. 조금 움푹 파인 눈두덩이. 저 붕대 안의 눈이 퉁퉁 부어 있음을, 바이러스는 이미 알고 있었다. "시시하지 않게 해줄까……?" 팽팽하게 실이 당겨지듯 바이러스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트립은 듣지 못한 듯 계속 볼만 긁적이고 있었다. 영 답답한 모양이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던 바이러스가, "……." 포크를 든 손을 내리고 다시 주머니에 숨겼다. 하아. 깊게 숨을 내쉰 후, 바이러스가 물컵에 물을 따랐다. 꼴꼴거리며 차오르는 맑은 것을 빤히 보던 바이러스가 트립에게는 아무런 언질도 없이 스스로가 다 마셔버렸다. 목을 타고 넘어가는 감촉에, 그제서야 알았다. 제 목이 타는 듯 말라 있다는 사실을. 바이러스가 눈이 부신듯 눈을 감았다. 물이 흐르는 그 동선까지도 눈에 비춰서 엉망이었다. 눈앞이 선, 색으로 가득차서 울렁거렸다. 세상이 털실 덩어리처럼 보였다. 길게 이어지다가 끊기는 모든 것의 선. 바이러스는 자신이 이런 것을 보기 위해 태어난 것이라는 사실을 입속에 넣고 짓씹듯 생각했다. ㅡ
흐흥, 하고 웃던 트립이 케이크 조각을 잘라 포크로 집어 자신에게 내밀었다. 그래도 나름 과일도 얹어서 같이 꿰어놓은 것 같았다. 포크 끝의 체리가 반질반질하게 빛났다.
"기분 좋으니까 바이러스한테 줄게." "필요없어." "그러지 말고. 먹어, 먹어." 먹이기 위해서, 라기 보다는 무작정 사람을 찔러 죽일듯이 푹푹 내미는 포크가 바이러스의 볼에 닿았다. 생크림이 볼에 꾹 눌려지는 느낌에 소리없이 짜증을 내던 바이러스가 트립의 손으로부터 포크를 빼앗았다. 스스로 입에 넣고 우물거리는 옆 얼굴이 웃긴지 트립이 배부른 사자처럼 웃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시계를 확인했다. 뭐, 이번에도 모르고 넘어가겠지. 그러다가 조금 있으면 아오바에게서 온 메시지에 지금까지 기분 나빴단 것은 싹 날아가듯 기뻐하겠지. 카운트 다운을 하는 기분으로 느긋하게 턱을 괴며 트립이 빈 포크를 받았다. 다시 돌아 앉아 말랑한 케이크를 포크로 잘라 크게 조각을 낼 때였다. 재촉이라도 당한 듯한 타이밍에 바이러스의 코일이 울리는 소리가 났다. 아. 어지간하면 반응하지 않는 바이러스의 드문 목소리를 들으며, 트립은 대수롭지 않게 크게 입을 쩍 벌려 케이크를 씹어 삼켰다. 부드러운 생크림이 입안에서 살살 녹았다.
"바이러스."
받게된 이름은 바이러스였다. 혼자서도 굳건한 무언가의 내부에 침투해 부식시키고, 때로는 원래 있던 것의 흉태를 어그러뜨리는, 무언가에 기생하며 증식하는 것의 이름이었다.
"바이러스, 대답하렴."
물론,
"…네. 닥터."
그것을 불쾌하게 여긴 적은 한번도 없었다. 불리는 것이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무엇으로 지칭된다해도, 특별해질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좋아, 착한 아이로구나."
아아, 뭐가 되었든 참으로 지긋지긋하다. 어린 바이러스는 자신쪽으로 넘겨오는 코드들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가만히 인형처럼 몸에 힘을 빼고 앉아있자 곧 어른들의 손이 다가와 이마와 목 옆, 관자놀이 부근에 선을 연결시켰다. 삐릿, 하고 전류가 흐르기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 손끝이 저리기 시작했다. 어차피 타인에게 기생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존재에게 뭔가를 끌어내려 한다는 것 자체가 우습다고 생각했다.
혼자 동떨어져 지내는 것도 그리 나쁜 방식은 아니었다. 이 곳을 지배하는 법칙이란 밖의 것과 아주 다르지만 단순했다. 소동을 벌이지 않고 얌전히, 어른들의 말에 따르기만 하면 이후엔 순탄했다. 자신은 그저 책 몇권 손에 들고 앉을 의자만 있으면 만족했다. 또래의 아이들이 몇 번 말을 걸어와도 반복해서 무시하면 끝내 소리들은 끊겼다. 혼자만 잠겨 떨어지는 것은 이토록 쉬웠다.
그러니까, 지금까지는 이토록 순조로웠었는데.
"…어이."
"음?"
"어디까지 따라오는거야?"
"아, 드디어 말했다."
"네가 할 말은 아니지 않은가 싶은데……."
저 벌건 진흙 덩어리 같은 것과 마주치기 전엔, 모든 게.
어린 바이러스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고, 이제 막 얼굴의 상처가 나아가는 어린 트립이 어깨를 으쓱였다. 별 것도 아닌데 유난이라는 태도였다. 무어라 말하려다가도 말이 뚝 끊겼다. 짧게 한숨을 내쉬어도 꿈쩍하지 않는다.
"앉을 수 있는 곳까지 갈거잖아?"
"……."
"거기 갈거야."
"…그럼 너 먼저 가."
"싫어."
그래, 이런 점이다.
바이러스가 잠시 숨을 고를 때였다. 트립이 덧붙이듯 말했다.
"떼어 놓을 생각이잖아."
아무렇지도 않게 패턴을 읽어내는 점. 트립은 바이러스와 마주친 눈을 아래로 내렸다. 딱히 시무룩하게 쳐진 것 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잠잠하게 목을 드러내 자신에겐 공격 의사가 없다고 보이는 맹견을 보는 것 같았다.
"죽는 것도 아닌데?"
"싫어."
"…흐음."
눈을 가늘게 뜨던 바이러스가 잠시 멈췄던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는 말없이 복도를 걸었다. 타박타박. 걷는 소리에 또 걷는 소리가 섞여서 두 개로 불어났다. 바이러스는 제 그림자가 살아서 걸음 소리를 내는 것과 같은 거라고 잠시 생각했다가, 곧 모든 것을 잊었다. 필요하게 느껴지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같은 공간에 있어도 의미가 없으면 그저 의식있는 살덩어리 같은 것에 불과했다.
이식 수술에 대한 선별 리스트가 나왔다. 제 1 순위로 선발된 것은 자신이었다. 결정권이 있는 것도 아닌 통보식이라서, 어린 바이러스는 그렇군요. 하고 조용히 답했다. '보는 것'을 더 강화시켜준다는 설명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뭐든 제 몸으로 담고나서 스스로 터득할 일이었으니까.
"……."
아무 생각도 없는 와중, 아, 트립 녀석이 제 뒤를 걸었을 때는 어떤 식으로 걸었더라? 하는 것만 떠오르다가 사라졌다. 신체 검사실이라고 쓰고 실험체 확인실이라고 읽는 곳에 들어가기 직전이었다. 잠시 옆을 돌아보자 짐승과 눈이 마주쳤다. 아주 순간이었다. 가장 마지막으로 따라오던 어른이 바이러스를 밀어넣듯 걸으며 문을 닫았다.
"이것 보렴."
화면에 자신의 무표정이 둥둥 떠올라 있었다. 지금 자신의 눈과는 다른 색 눈을 가진 자신이었다. 수술을 하고 나면 이렇게 변한다는 걸 미리 보여주려는 것 같았다. 자, 바이러스. 눈색은 네가 바라는대로 해줄게.
무척 선심쓴다는 듯한 말에 다시 화면을 들여다 보았지만 마치 게임상에 뜨는 캐릭터같은 느낌이 들었을 뿐이었다. 제 손위에 들린 단추가 하나뿐인 리모콘을 누르자 몇 개의 자신이 지나갔다.
"…이걸로 할게요."
갑자기 모든게 다 귀찮아졌다. 취소 버튼도 없는 스타트 버튼따위, 언제 누르든 마찬가지였다. 몇 번이고 넘겨봐도 그게 그것처럼 보이고, 비슷하면서도 다른 듯 같아 보여서 우스웠다. 멈춘 화면에 미래의 자신이 떠있었다. 아무런 표정도 없는, 마네킹같은 존재. 기생하며 살아가는 바이러스.
"이 색이 좋아요."
어른이 되어가는 자신이 거기에 있었다. 어쨌거나 자신은 필요하게 되었구나, 하는 감상만 짧게 들었다. 제 원래 눈색과 비슷한 색도 있었지만 일부러 확연히 다른 것을 골랐다. 기왕이면 돌이킬 수 없다는, 그런 상실감이 확실한 편이 좋을 것 같아서였다.
"……."
"죽었어?"
"…아니, 아직."
눈에 붕대를 감은 채 침대에 누워있던 바이러스가 작게 대답했다. 근처에 얼씬거리던 트립이 그렇구나, 하고 말하더니 다시 웅크리듯 엎드렸다. 눈이 보이지 않으니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 침대 한 구석이 눌리는 무게감으로 추측할 수 밖에 없었다.
"몰래 들어왔어."
"그래…."
기겁할 이야기였지만 딱히 불편하다거나 꺼슬거리지는 않았다. 어차피 들켜도 나중에 처분받는 건 트립의 이야기였을 뿐이고, 자신은 현재 이식 수술로 손가락 하나 꼼짝하기도 귀찮은 가련한 환자였다. 실험체가 그 가치를 다하게 되는 순간까지 한 발자국 앞두고 있는 때. 귀중하게 다뤄질 때였다. 그렇게 방비가 허술할 리가 없지. 그리고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어린 아이가 몰래 몸을 비집고 들어올만큼 만만한 곳은 아니었다. 트립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게 분명했다. 다만, 그걸 지적할만한 의욕이 없을 뿐이다.
"정말 새하얘서 곧 죽을 것 같아."
"그랬으면 좋겠네."
"하하."
웃음 소리가 들리는 듯 싶다가 침대 한 구석이 더 무겁게 내려앉았다. 이번엔 엉덩이를 걸치고 앉은 모양이었다. 트립이 손을 뻗어 바이러스의 눈두덩이를 가린 붕대를 손끝으로 툭툭 두드렸다. 마취제가 혈관을 돌고 있는 덕에 아프지는 않았다.
"어떤 색으로 했어?"
"……."
"봐도 돼?"
본래 시력이 나빴으니 새로 눈을 갈아 끼워도 다시 나빠질 확률이 높다는 말은 들었다.
"보여줘."
아니, 그 전에. 회복 단계에 들어가기 전에 빛을 보면 시력에 좋을 리가 없었다. 안정에 들어갈 때 까지는 손도 대선 안된다는 말을 몇 번이고 들었었지. 남일처럼 생각하던 바이러스가 고개를 한쪽으로 돌렸다. 붕대를 벌리려는 듯 틈으로 간질거리는 손가락을 떨쳐내기 위해서였다.
"저리 떨어져."
"역시 싫어?"
"귀찮아."
"그런 이유야?"
아, 그래. 빛을 잘못 보면 잘 끼워넣은 눈이 작용하지 못해서 실명할 수 있다는 가능성…까지 들었었던 것 같다.
"실명할 수도 있대."
만지작거릴 것이 없어서 이번엔 이불을 들었다가 놓았다 펄럭이며 트립이 대꾸했다.
"그래?"
"가능성의 얘기라지만. 다 나은 후에 보면 되는 문제잖아?"
"난 지금 보고싶은거야. 알잖아?"
언제 그렇게 말수가 많으셨다고 따박따박 말을 붙여오는 게 영 성가셨다. 발로 차서 밀어낼까, 따위를 생각하던 바이러스가 움직이는 것을 그만뒀다. 제 근처에 있는 꼬마가 그동안 얼마나 많은 아이들을 물어 뜯어 왔는지 세어 보려면 손가락을 다 쓰고도 넘쳤다. 아……. 잠시 의미없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보여주면, 내가 네 눈이 될게."
"……?"
"난 바이러스보다 더 커질거고, 쓸만해질 걸. 보기만 할 줄 아는 눈보다 훨씬 나을거야."
"하아……."
"눈을 줘. 바이러스, 가지고 싶으니까."
대답도 하기 전이었다. 트립의 손이 다시 붕대 속으로 슬금 들어왔다. 위에서 아래로 벗길 생각인지 갈고리처럼 구부러진 손가락이 억셌다. 바이러스는 트립의 가슴을 쳐서 밀어낼 수 있었지만 그런 것도 그만두었다. 트립은 어차피 무슨 일이 있어도 제 눈을 빼어 갈거라는, 알지 모를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바라는 것이면 뭐든 해버리곤 했다. 규칙, 폭력, 언어. 뭐든지 소년에게만 가면 궤도가 어그러져 바닥을 뒹굴었다.
아직 여물지도 못한 눈에 빛이 들어오자 머릿속 깊이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본능적으로 눈을 감싸고 고개를 푹 숙였다. 눈물이 질근 새어나오고 저절로 이가 악다물렸다. 그 순간 트립의 얼굴을 보긴 했는지 조차 알 수 없었다. 링겔 바늘이 빠지며 손등 쪽도 시큰했지만 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디선가 벨이 울리는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발소리가 우루루 들려왔다. 어른들이 다급하게 무언가를 끌고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마와 이마가 맞닿을 때까지 가깝게 다가와있던 어린 것의 숨이 뒤로 훅 끌려나갔다.
그건 드물게도……아주,
유쾌한 기분이었다.
"…아하하!"
ㅡ
"바이러스."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드는 것과 동시에 안경알에 무언가 톡 부딪쳤다. 아무리 단련해도 강해질 수 없는 부위 중 하나가 눈이었지만, 상대는 그런 지식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대수롭지도 않게 손가락을 가져다 대고 있었다. 게다가 생크림이 잔뜩 묻어서 안경알 위에서 쭈욱 아래로 미끄러졌다. 눈 앞에서 무언가 허옇게 거품처럼 끈적하게 일어나는 것을 보고 있는 건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하지마, 더러워."
"우와, 너무해. 이래 보여도 요 근래 제일 잘나가는 생크림 케이크인데."
"그런거면 낭비하지 말고 입에 넣으라고……."
"핥아도 돼?"
"안돼."
"깐깐하긴."
낭비하지 말라고 했던 건 바이러스인데 말이지, 하며 부스럭거리며 마저 먹는다. 안경을 슥슥 닦아 다시 쓰며 바이러스가 인상을 썼다. 트립은 단 것을 좋아하는 편이라 눈만 떼면 저렇게 한가득 스위츠를 쌓아놓고 먹곤 했다. 이번엔 새하얀 크림으로 가득한 케이크를 포크로 잘라 먹고 있었는데, 그 옆모습을 가늘게 뜬 눈으로 보던 바이러스가 어깨를 으쓱이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무어라 쓴소리 더 붙이고 싶어도 들은 척 하나 하지 않을 걸 알기에 비효율적이었다.
코일의 기능을 이용해서 내일의 스케쥴 따위를 정리하던 참이었다. 내일은, 조금만 일을 몰아 버리면 일찍 끝내버릴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바이러스ㅡ."
"응?"
"내일 아오바 만나러 갈래?"
"…? 뜬금없이."
"싫어?"
"그런 건 당연히 아니지."
"그럼 됐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