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리아오] 모든 사랑은 천국에서 이뤄진다.
*클리어 리커넥트 루트 플레이 완료한 것+클리어 생일 축하글
*사망 요소 주의! 본편, 리커넥트 네타 다량 함류!
*덧글로 비하인드 설정? 몇 개 풀립니다. 안 보셔도 상관은 없어요(소심소심) 그런데 꼭 본문 글 읽고 봐주셔야 해요 8ㅅ8)/
*https://www.youtube.com/watch?v=sTWMsDlVGc0 사쿠라나가시(桜流し)를 들으면서 썼어요. 읽으면서 같이 들어주시면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클리어라고 합니다.
저는 기계로 된 몸을 지니고 있어요. 그러니 굳이 인간처럼 매번 수면 활동을 취해야하지는 않습니다만 습관처럼 밤에 눕고, 아침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천장이 밝아져 있는 걸 보니 이제야 해가 뜬 모양이네요. 저는 똑바로 누워 두 손을 깍지낀 채 배 위에 올려둔 상태에서 가만히 있었습니다. 해가 뜨긴 했지만 아직 이른 시간입니다. 그래서인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요. 집 밖도, 집안도, 모두 조용합니다. 다들 자고 있는 거겠지요. 지극히 안락하고, 평화로운 시간입니다. 예전의 저는 이 시간을 무척 두려워했었죠.
"……."
그때입니다. 가벼운 손길로 저를 깨우는 듯한 작은 발소리가 들립니다. 바닥을 통통 튕기듯이 도독도독, 하고 울리는 소리가 마치 도토리들이 연거푸 떨어지는 소리 같아요. 올메이트인 렌 씨입니다. 그도 평범한 강아지가 아니기에, 규칙적인 일과에 아주 익숙하죠. 아침이 되면 저를 보러 와주게 된 것도 언제부터일까요. 저희들에겐 시간이 중요한 적이 없어서, 떠오르는 것도 우스운 일이긴 합니다.
저는 상반신을 일으켜 침대에 앉았습니다. 맨 발을 바닥에 대고 뒷목을 문지르고 있을 때, 문이 끼이익 열리고 보슬보슬한 털뭉치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저는 렌 씨를 위해서 언제나 문을 조금 연 상태로 두고 있습니다. 분홍 혀를 내민 강아지가 제 발치로 착착 걸어옵니다. 서로 눈이 마주칩니다.
"…좋은 아침, 렌 씨."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렌 씨는 간지러운 듯 눈을 꼭 감지만 피하지는 않습니다. 손을 떼자 렌 씨가 두 발로 반짝 서서 제 다리에 발을 올렸습니다. 이제 일어나라는 거겠지요? 제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렌 씨가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멍!"
"응. 오늘도 좋은 하루가 될 것 같아요~"
"멍! 멍!"
저도 답하듯 다정하게 웃고 자리에 일어섭니다. 이불을 갤 생각으로 집어들고, 잠시 시트를 손으로 쓸어 보았습니다. 약간의 온기는 남아 있지만, 당신이 누워있었을 때와 비교도 안되게 차갑습니다. 역시 아오바 씨보다 따뜻한 건 이 세상에 없었어요. 온도의 의미가 아니에요. 그것보다 조금 더 추상적이고, 복잡한…의미의 이야기입니다.
렌 씨가 잠시 헥헥 거리다가 구석에 놓아둔 방석 위에 편하게 앉습니다. 저를 기다리는 걸 거예요. 저는 쓰게 웃고는, 흐트러짐 없이 이불을 개어 침대 위에 올려둡니다. 그러자 금방, 방금까지만해도 조금이나마 남아 있던 생활감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어쩔 수 없나봐요. 저는 인간이 아니니까요. 문득 한기가 느껴져서 고개를 들었습니다.
잘 계신가요. 아오바 씨. 당신께서 먼저 가시고 꽤 시간이 흘렀습니다. 저는 여전히 당신이 그립습니다.
ㅡ
클리어가 아오바와 함께 산지도 몇 년. 타에가 눈을 감을 때에도 그의 곁을 지켰다. 그리도 기세등등하고 건강하던 타에의 존재가 사그라드는 것을 보는 것은 꽤 힘들고, 슬픈 일이었다. 보드라운 것에 감싸여 누워있는 그 몸이 그리도 작고 마르다는 것을, 클리어는 그제서야 느리게 인식했다.
타에를 묻어주고 돌아온 날 밤, 빨갛게 물든 눈으로도 억지로 웃는 아오바를 품에 안고 다독이면서 지새웠던 때도 있었다. 그들은 서로 손을 잡으며 살았다. 닮아가듯이 배우고, 그렇게 언제까지고 흐름에 묻혀서 지냈다. 행복했냐고 묻는다면 당당하게 말해도 될만큼 행복하게 지냈다.
영원을 순간처럼, 순간을 영원처럼. 단단한 것에 새겨진 흠처럼 언제까지고 함께였고, 함께였다.
손을 잡고 잠들고, 품에서 눈을 뜨고, 함께 마주보며 지내며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고, 때로는 당신을 품에 안았다. 그런 나날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을만큼, 자랑스럽게 지냈었다.
「좋아해요, 아오바 씨. 좋아해요.」
「정말, 좋아하고 있어요.」
…그리고 또 몇 년후. 식물처럼 늘어지던 타에와는 달리 아오바는 아무런 전조도 없이 쓰러졌다. 그는 그대로 병원에 실려갔고, 뒤늦게 소식을 접한 클리어가 병원에 연락했으나 면회를 거절당했다. 하다못해 아오바 씨의 절친한 올메이트인 렌이라도 들여보낼까 했는데 그것도 마찬가지였다. 눈앞이 깜깜했다. 어떡하면 좋을지 몰라 허둥지둥 서두를 때 코일이 울리고 영상이 떠올랐다. 환자복을 입고 있는 아오바의 얼굴이 보였다.
"아오바 씨!? 괜찮아요!? 많이 아프신건가요!? 죄송해요, 당장 가고 싶은데 거절,"
[우와아아, 진정해, 클리어. 알겠으니까….]
"어떻게 진정해요! 아오바 씨가 아프신지 몰라서 정말 죄송해요! 아오바 씨……."
[이럴 줄 알았다니까…. 음, 놀라게 해서 내가 더 미안해. 그런데 지금 시간이 없으니까 짧게 할 말만 할게. 다시 한 번 미안.]
"네……."
잔뜩 시무룩해진 클리어를 위로하듯 아오바가 웃었다. 별 일 아니라는 것 같았다. 최근 병원에 감염에 대한 방비 시스템을 재점검하는 시기라 유독 면회에 까다로운 것 뿐이니까,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라는 말을 했다. 아오바 씨는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일은 두 번, 세 번 더 강조하고 대답을 들으려 하는 습관이 있었다. 클리어는 그때 자신이 한 4번은 얌전히 기다리겠다는 대답을 했다고 기억한다.
먼저 연락할 때 까지 연락하지 말 것.
얌전히 기다릴 것.
걱정하지 말 것.
평소처럼 지낼 것.
또 한 번, 먼저 연락할 때 까지 연락하지 말 것.
또 한 번, 걱정하지 말 것.
먼저 연락할 때 까지…기다릴 것.
사실 기다리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강조할 일인가 싶어서 고개를 기웃거렸으나 통화는 끊어진 상태였다. 초조하게 코일을 만져봤지만 이쪽에서 먼저 연락할 수가 없었다. 방금까지 그렇게 당부를 받았는데, 왜 이렇게…….
[걱정마라. 아오바가 저렇게까지 말한다면 걱정할 것 없겠지.]
"…그렇, 겠지요?"
[물론이다.]
"으응. 그럼…, 아오바 씨가 돌아오면 퇴원 기념 파티라도 할까요?"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렇네요! 이것저것 잔뜩 만들어요! 기뻐해주시겠죠?"
[그렇게 생각한다.]
불안감을 떨쳐내기 위해 렌을 두 손으로 잡고 들어올린 클리어가 그를 품에 꼬옥 안았다. 보슬보슬한 털에 볼을 부비자 렌이 또 당황한 듯 다리를 버둥거렸다. 그만둬달라는 말이 몇 번 들렸지만, 클리어는 듣지 못한 듯이 행동했다. 자꾸만 쓰다듬고, 꼬옥 끌어안았다. 손끝이 떨리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선 어쩔 수가 없었다.
ㅡ
아오바가 병원에 간 지 몇 개월이 지났다. 연락은 종종 오다가 아예 끊어지듯 하게 되었던 차였다. 클리어는 몰래 만나러 가볼까, 따위를 생각하며 병원 주위를 어슬렁거렸지만 늘 벽을 넘지 못했다. 힘차게 뛰어오르면 가능할 것도 같았지만 뭔가에 가로막힌 듯 매번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아오바의 몸은 기계인 자신과 달라서, 섬세하고, 어떻게 보면 너무도 약했다. 자신의 행동 하나에 무언가가 꺾일까봐 그게 지독하게도 두려웠다.
비닐 우산의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오바 씨……. 몇 번이고 부른 이름이 또 한번 한숨처럼 흘러나왔다.
"…다녀왔습니다……."
언제부터인가 그의 일과는 눈뜨자마자 병원으로 가거나, 병원이 보이는 곳에서 쭉 그 건물을 지켜보다가 어두워지면 집으로 돌아오는 일이었다. 터덜터덜 걸어서 돌아온 그가 현관을 열었다. 이렇게 인기척을 내면 언제나 렌이 타박타박 마중 나와줬고, 그럼 클리어가 렌에게 인사를 하고. 둘이서 간단한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하루 일과가 끝나곤 했다.
"응? 렌 씨?"
보폴거리는 털을 지닌 강아지의 모습이 눈에 띄지 않았다. 이상하게 여긴 클리어가 서둘러 신발을 벗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이리저리 두리번거려도 보이지 않아서 점점 불안해졌다. 렌 씨? 하고 살짝 키운 목소리로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서둘러 계단을 밟고 올라가 아오바가 지내던 방 문을 열었다. 그리고 바닥에 누워있는 작은 몸을 발견했다.
"아, 여기 있었구나. 찾았다고요. 다행이다."
입안이 어느새 말라 붙어 있었다. 한껏 긴장한 모양이었다. 클리어가 렌에게 다가가 기동을 시키려는 순간이었다. 평상시와 뭔가가 달랐다. 렌의 슬리프 모드는 이렇게 옆으로 쓰러진 듯 누운 자세가 아니라, 둥그렇게 몸을 감거나 편하게 자고 있는 듯한 모양인데. 그리고 오늘의 자신은 렌을 슬리프 모드로 돌리지 않았는, …….
띠르르릉.
코일이 아닌 집전화가 울렸다. 클리어는 얼음처럼 굳어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텅빈 집에 생물체라곤 한 마리, 한 명도 없는 집안의 공기가 갑자기 무겁고 차갑게 느껴졌다. 아오바의 웃는 얼굴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윽."
아냐, 괜찮다고 하셨……으니까. 클리어가 렌을 기동시킨 후, 바로 전화를 받으러 움직였다. 렌이 눈을 뜨는 것 까지는 확인했으니 괜찮을거라고 생각했다. 혹시 전원이 모자라서 급히 절전 모드로 들어갔다거나, 했을 수도 있었다. 클리어는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받았다. 왜 떨리는지 알 수 없었다. 다 괜찮은데. 이상한 일이야.
"여보세요. 세라가키 아오바 씨 집입니다."
"…클리어 씨?"
수화기 너머에서 들어본 적이 있는 목소리가 들렸다. 병원쪽 사람이었다. 클리어는 조금이라도 더 잘 듣기 위해 수화기를 제 귓가에 더 꾹 눌렀다.
"이런 말씀 전해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꾸욱, 눌렀다.
"저희도 최선을, 다했지만…. 세라가키 아오바 씨는……."
꾸우우욱.
"…정말 죄송합니다……."
"……."
헤어지는 순간은 별이 떨어지는 것을 보는 것과 같다. 소원을 세 번 빌 정도로의 시간따위는 주지않고 멀어져가는 빛의 꼬리. 클리어는 눈 앞이 가물가물해지는 것을 느꼈다. 센서의 이상이 없는데도, 그렇게 여겼다.
타탁, 하고 작은 발소리가 들렸다. 클리어는 제대로 끊지 못한 수화기를 잠시 귀에서 떼고 그를 보았다. 아오바의 올메이트. 자신과는 다른 의미의, 아오바의 파트너가 그 곳에 놓여 있었다.
"…렌 씨."
[…….]
"어떡…하죠."
[…….]
"아오바, 씨, 가…."
[…멍!]
헉, 하고 숨이 중간에 끊어지듯, 막혔다.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다시 한 번 렌이 멍! 하고 짖었다. 클리어가 들어보지 못한 음성이었다. 아, 정말이구나. 희안하게도 이렇게 직감했다. 렌 씨는 쭉 자신과 함께 있었는데. 이상한 기분이었다. 자신만 남겨두고 다 가버린 기분이었다. 아저씨, 타에 씨, 렌 씨, 정말로, 아오바 씨는…….
아오바 씨가…….
그럼 이제 어떡하죠…….
대답은 어디에도 없었다. 늦은 가을, 당신께서 춥지 않을까 바람 불때마다 걱정하던 그 계절. 당신이 숨을 떨어뜨렸다. 혼자 둘 생각은 아니었으나 그렇게 되어 버렸다. 그 생, 그렇게 외롭게 보내고 싶지 않았었다.
ㅡ
드디어 모든 준비가 끝났다. 생각보다 시간이 걸린 건, 이왕 하는거 더이상 흔적 하나 걸리적거리지 않도록 깔끔하게 처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집을 팔기 위해서는 최소한 오늘이 되어야 했다. 클리어는 이 우연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보았지만, 말그대로 그냥 우연이겠거니, 하고 넘겼다.
클리어는 전에 비교하면 텅텅 빈 집안을 마지막으로 둘러봤다.
"안녕하세요, 클리어 씨!"
"아, 어서오세요. 죄송해요. 이른 시간에 약속을 잡아서…피곤하시죠."
"사정이 있으시다니 어쩔 수 없죠. 곧 여행을 떠난다고 하셨던가요?"
묵직한 가방을 들어보이며 클리어가 웃었다. 마주한 남자도 따라 웃더니 계약서를 꺼냈다. 자, 여기에 싸인하시면 되는거예요. 클리어가 펜을 들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본디 이런 자격도 권리도 자신에게 있을리가 없는데, 저절로 그렇게 됐다. 이것도 다 아오바 씨의 배려였다. 생전에 그런 절차를 해뒀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엔 웃음도 나오지 않고 밤새 울었었는데.
"오늘."
"네?"
"오늘…사실은 제 생일이예요."
"…아, 그러셨구나. 축하드려요, 클리어 씨!"
"하하. 감사합니다."
가볍게 슥슥 긋는 것으로 싸인을 대신하고, 펜을 건넸다. 이제 이 집은 누군가에게 팔려질 것이다. 이대로 누가 들어오는지, 헐어서 어떻게 쓰는지는 그 사람의 자유였다. 가능하면 아오바, 타에 씨와 연관이 있는 사람이나 혈족에게 넘겨주고 싶었으나 끝끝내 찾지 못해 어쩔 수 없었다.
"감사합니다. 그럼 즐거운 여행 되세요!"
"네에."
"미도리지마에서의 생활이 즐거웠기를! 참, 잊을 뻔 했네. 이거 받고 가세요."
표면상, 클리어는 오늘 미도리지마를 떠나는 걸로 되어 있었다. 클리어는 이제 막 나가려는 차에 남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전해지는 것은 작은 짐꾸러미였다. 이건? 하는 시선으로 보자 잘 모르겠다는 듯 볼을 긁적이며 자신도 부탁받은 것이라는 말만 했다.
…이제와서 뭐든 상관없을 일이지.
클리어는 그대로 주머니에 쑤셔넣었다. 남자는 그게 어떻게 들어가냐는 듯 뜨악한 얼굴이었으나 귀찮게 물어오지는 않았다. 클리어는 산뜻하게 손만 흔든 후, 한 손에 갈색 여행 가방을, 다른 손으로는 렌을 끌어안고 집을 나갔다. 배웅해주는 이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길을 계속 걸었다. 맞닿은 공기가 살짝 차가운 정도가 좋았다. 짧게 휘파람을 분 클리어가 문득 용건을 떠올린 사람처럼 렌을 내려다 봤다.
"렌 씨, 저 오늘 생일이예요."
[멍!]
"응,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클리어가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아오바 씨. 아오바가 있든 없든, 클리어는 아오바를 호흡하듯 떠올렸다. 하늘이 맑고 푸르렀다.
아오바 씨.
저는 여전히 당신이 그립습니다. …당신께서는 잘 계신지요?
ㅡ
클리어는 종종 아오바가 어떻게 숨을 거뒀을지, 를 상상해보곤 했다. 침대에 누워 자고 있는 모습은 매일 밤 봐왔으니 상상하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 가장 마지막에 본 얼굴은 약간 여위고, 새하얗게 질려있던가. 많이 힘들었을까. 많이 아팠을까, 따위를 생각하면 몸 안을 채운 나사들이 심하게 죄이는 듯 고통스러웠다. 클리어는 한참을 걸어 아오바의 무덤으로 갔다. 타에가 있는 곳 바로 근처였다. 할 수 있다면 옆에 묻어주고 싶었지만, 이것 저것 사정으로 힘든 나머지 양보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것까지 완벽하게 해줄 수 없다는 건 꽤 괴로운 일이었다.
"…아오바 씨."
맨들맨들한 석판을, 연인의 살을 만지는 손길로 어루만지며 클리어가 속삭였다.
"저, 생일이에요. 그래서 오늘은 하루종일 같이 있을거예요……."
그래도 괜찮죠? 허락을 구하듯이 눈치를 보던 클리어가 눈매를 접으며 웃었다. 답은 없었지만, 그래도 상냥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는 꽂혀있던 꽃을 빼고 새로 사온 꽃을 꽂았다. 매번 생화를 사와서 꽂았었다. 언제든 자주와서 갈아줄 자신이 있었고, 기왕이면 생생한 꽃을 곁에 두고 싶었다. 아오바 씨는 인간이었고, 기왕이면 생명있는 것을 안게하고 싶었다.
살아계실 때엔, 계속… 모조품과 함께 살게 해서 죄송하기 짝이 없었다.
"…이번에는 조화로 사왔어요. 마음에 들어하시면 좋겠는데요."
그래도 나름대로는 심사숙고해서 고른 꽃들이었다. 큼직하고 금색 가루들이 뿌려져서 반짝거렸다. 혹시 모자랄까 싶어서 스프레이로 물도 뿌려놓아 겉으로 보기엔 촉촉했다. 프로포즈라도 하듯 신중하게 한쪽 무릎을 꿇고는 꽃을 꽂았다.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손길로 꽂은 후에야 겨우 숨을 크게 뱉었다. 네, 다 됐습니다! 두 팔을 번쩍 벌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까지 살짝 빨개진 채로 기다리던 클리어가 천천히 웃었다. 아오바가, 좋아해주던 얼굴이었다.
"어때요?"
살아 계셨다면 아마, 넌 너무 호들갑스럽다면서 가볍게 핀잔 하셨을 테였다. 그 음성을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끝내는 고마워, 하고 답해주시겠지. 상냥함이란 건 그런 것이라는 걸 아오바를 통해 배웠었다.
…고맙습니다. 클리어가 소리내서 대답했다. 방금 막 빼어놓은 꽃의 냄새를 맡으려는 듯 움직이던 렌이 짧게 짖었다. 꼭 재채기를 하는 것 같았다.
ㅡ
당신은 상자에 담겨서 내 곁으로 왔었습니다. 그 상자는 이미 아무도 열지 못하게 봉해져 있어서, 당신께서 원래부터 비밀스러웠던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아오바 씨를 끌어안으면 품에 가득 안겼었는데, 이렇게도 작아질 수 있는 걸 보니 역시 신기했습니다. 저의 나사, 골격처럼 빽빽한 철골과 같은 걸까요. 태워지면 이렇게도 작게 변할 수 있다니. 지식으로는 알고 있지만 보는 것은 처음이라 실감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상자를 품에 안고 꼬박 삼일간을 그렇게 지새웠습니다. 제가 인간이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영원히, 변함없이 당신을 그리듯이 그리워하겠지요. 당신에게 보낼 수 있는 마음이, 정말로 제게 있다면,
당신께서 기뻐해주시길 바라면서, 온 힘을 다해…사랑하고자 했습니다.
"안되겠어요, 아오바 씨…."
그리고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만큼 쉬웠습니다.
"사랑하는걸……."
이미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깨를 떨며 꼴사납게 울고 있었습니다. 아오바 씨, 아오바 씨. 당신은 태어나서도 그랬겠지요. 당신은 언제나 아름다웠고, 지금도 또한 그렇습니다. 저희는 저희의 이별을 미리 생각하고 두려워했지요. 저도 그랬습니다만, 막상 닥쳐오니 정말로 힘들고 힘겨워서. 그저 당신이 사랑스럽다고 생각했습니다.
"흑, 윽…. 아오바 씨……. 좋, 으, 좋아해요……."
이 몸뚱이가 너무도 무겁게 여겨져서, 저는 아주 오래 오래 울었었습니다. 부서지도록 전했음이 분명했으나, 아직 아무것도 전하지 못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ㅡ
날이 꽤 어두워졌다. 하루종일 묘비를 씻어주고, 풀을 다듬고, 곁에 앉아 노래를 부르다보니 시간이 이리도 흘렀다. 이제 클리어의 곁에는 렌도 없었다. 아오바의 친구가 사는 집을 지정해서 그곳에 심부름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돌아오게 하는 지시는 넣어두지 않았으므로 계속 그 집에 머무르지 않으려나? 아오바 씨의 친구라면 렌을 맡아 돌봐줄 거라 생각했다. 자신이 데려가기엔 너무 미안했다.
조금 볼록한 묘지의 옆에 앉은 클리어가 살짝 희미한 의식을 다잡으며 비닐 우산을 펼쳤다. 투명해서 하늘까지 다 보이는 우산을 한 번 돌리며 숨을 내쉬었다. 클리어가 억지로 자신의 에너지를 흘리듯 낭비한지도 일주일. 이제 슬슬 반응이 있을 때이긴 했다. 모두 오늘을 맞이해서 준비한 일이었다.
"……. 죄송해요…."
역시 아오바 씨라면 혼내실까, 생각했다. 차가운 묘지에 볼을 대고 기대는 순간, 주머니에 이질감이 느껴졌다. 아, 그런게 있었지. 클리어는 눈을 천천히 감으며 생각했다. 중요한 건 아오바 씨 외엔 아무것도 없었으니, 나중으로 미뤄도 될 것 같았다. 일단, 너무나, 졸렸다…….
ㅡ
당신의 꿈을 꿨습니다. 기계가 꿈을 꾼다고 말할 수는 없겠죠. 이건 아마, 그동안 제가 겪어왔던 기억 메모리가 멋대로 꺼내 정리하듯 가동되는 것 뿐일 겁니다. 제 기억 회로는 아오바 씨의 것을 가장 중요하게 분류하고 있으므로, 저는 언제나 아오바 씨의 꿈을 꿉니다.
아오바 씨는 웃을 때마다 조금 개구진 인상이 되어요. 본인도 살짝 짓궂은 면이 없잖아 있어서 그런걸까요. 푸른색의 머리카락이 눈 앞에서 살랑거리면 저도 모르게 손이 가곤 했지요. 눈 앞의 푸른색에 눈이 멀어 손목을 잡고 끌어당기면 영문모를 얼굴을 하시면서도 곁에 다가와 안아주셨습니다.
「클리어.」
그 음성을 어제처럼 기억해….
「클리어, 클리어.」
그 손길을 오늘처럼 떠올리고….
「…잘 있어.」
내일처럼, 무너졌다. 한가득 품에 안고 있던 아오바 씨가 젖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라, 이건 언제적 일이더라…. 어리광 부리듯 볼을 부비는 와중에서도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클리어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아오바의 얼굴을 마주했다. 제 주인. 제 연인은…….
어라, 아오바 씨. …울고 계세요?
…….
울지 마……. 내가 잘못했어요…….
ㅡ
"…읏."
파직, 하는 소리와 함께 따끔한 전류가 머릿속에서 번쩍! 하고 일었다. 억지로 가동시키고 가동시킨 보람이 있긴 했다. 기껏 고쳐주신 타에 씨와 그 친구분께는 정말 죄송하다고 생각했다.
주위는 이미 검푸르게 어두워져 있었다. 깊은 바다에 잠겨있는 감각이었다. 볼에 닿은 흙이 차가웠지만, 이 안 만큼은 따뜻하길 바랐다.
클리어는 부스스 몸을 일으키곤 다시 고쳐 앉았다. 어느새 별이 떠 있었다. 바닷속에 잠긴 소금 결정같다. 해파리처럼 넘실넘실, 자신도 둥실둥실 떠올라 당신의 곁에 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
그러고보니 주머니에 뭔가 있었지. 기계인 덕분에 뭔가 잊는 일이 드문 클리어가 멍한 머리로 그것을 꺼냈다. 다시 한번 머릿속에서 파즉, 하는 소리가 났으나 이젠 별로 신경쓰이지도 않았다. 자꾸 미끌리는 손으로 어렵게 포장을 풀려고 손을 뻗었을 때였다. 익숙한 글씨, 라고 인식해버리고 말았다.
클리어에게.
사랑하는 너의, ㅡ가.
"아오바 씨."
급하게 기동이 빨라지는 바람에 이번엔 연달아 파지직거리는 소리가 났다. 조금 짧게 숨을 끊어 삼키며, 인상을 찌푸렸지만 여유가 없었다. 클리어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포장을 풀었다. 카드 한 장과 영상 장치가 있었다. 이미 데이터는 그 안에 들어있으므로 기동하기만 하면 안의 것이 그대로 허공에 영상화 시켜주는 기능이 있는 물건이었다. 이게 왜 지금…?
클리어는 카드와 장치 중에서 고민하다가 장치를 틀었다. 영상이 켜지는 걸 기다리는 시간이 천년, 만년이라도 걸린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잠시 후, 어두운 밤공기에 네모난 화면이 떠올랐다.
아오바 씨였다.
"…헉."
환자복을 입고 침대에 앉아있는 아오바는 조금 부끄러운듯 바로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듯이 '이거 정말 찍히고 있는 거 맞겠지?'하고 중얼거리더니 잠시 눈을 내리깔고 웃었다. 클리어는 온 몸이 전류로 관통당하는 느낌이었다. 제 메모리에 없는, 생생한 아오바 씨였다. 몸 안의 것들이 계속 빠른 속도로 돌아갔다. 가슴부위에 있는 무언가가 쿵쿵, 하고 뛰었다.
[…안녕. 음, 클리어?]
"…아오바 씨."
[이거 잘 보이나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해볼게.]
"잘 보여요, 잘 보여요. 걱정하지 마세요…. 괜찮아요."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저절로 입이 움직여서 대답을 했다. 어떻든간에 다시, 닿고 싶었다. 영상의 아오바는 잠시 또 입을 다물고 고민하고 있었다.
[…네가 이걸 보고 있다고 하면, 나는 이미 이 세상에 없다는 게 되겠지.]
"그런……."
[너라면, …근처에 이미 날 두고 있을지도 모르겠네. 어떤 형태…든.]
"……."
[괜찮아. 탓하려는 거 아니야. 그냥 멋대로…내가 생각한거야. 너라면 그러지 않을까 하고.]
"……."
[틀리면 조금 창피하겠지만, 괜찮겠지?]
"…흐, ……읍."
[…그러니까, 울지말고 이야기 들어줘.]
"흐윽, ……네, 아오바 씨……."
당신을 정말 정말 좋아했다.
[우리가 만나서 몇 번이고 얘기했다시피…, 우리에게 한계가 있지.]
"……."
[이제와서 얘기하는 것도 우습지만, 하지 않을 수 없는 얘기지. 사실, 어떻게 얘기하든 결론이 나지 않는 얘기라서…. 좀 망설여져.]
"…아오바 씨께서는, 흐, 무슨 말씀이든 하셔도 괜, 찮아요. 그러니까……."
당신이 정말 정말 그리웠다.
[일단은….]
"…네, …흡, 네."
[생일 축하해……. 클리어.]
당신을 정말 정말…….
정말로…. 사랑을, 해서…….
[혼자 둬서 미안해….]
"아오바 씨, 아오바 씨……."
[지금으로서는, 내가 널 얼마나 오랫동안 혼자있게 둘지 알 수가 없어서 더 걱정이야. …미안해. 원망해도 돼. 너무 빨리 갔다고, 생각해도 되니까…….]
"아니에요. 아오바 씨는, 윽, 큽, 열심,히 노력하셨어요. 흐윽, 아오바 씨는 잘하셨어요. 아오바 씨는……."
[하지만 역시, 이런 말. 후회만 남으니까, 내가 할 수 있는 말을 해주고 싶었어. 너에게 주는 선물…처럼.]
절벽 위를 기어오르는 듯한 생이었습니다. 까마득하고, 멀게만 느껴지는,
[그동안 고마워.]
"…으, ……."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정말, 좋아해. …많이 좋아해. 이런 말, 치사하지만…….]
"…허엉, 으,"
[…내게 주어진 시간. 한 평생 너를 사랑할 수 있었던 건 기쁘게 생각하고 있어….]
"으, 허어엉, 아오, 으, 흐으윽, 으, ……, 윽,"
[하하, 어떡하지. 보고 싶어졌어.]
"저도, 요……."
그것은 꿈의 성이었고,
[그래서, 클리어. 나도 이것저것 생각해봤어. …그래서, 지금하는 말은 잊어도 좋고. 따르지 않아도 좋아. 결국은 네가 선택할 문제라고…생각해. 내가 지금 이 말을 하는건,]
"…아오바 씨."
[…이런 말을 가장, 기뻐해주지 않을까……하고 계속 생각한 끝에 나온 결론일 뿐이니까. 틀려도……. 응. 알겠지?]
"네……."
기계가 가진,
[언젠가…, 언젠가의 이야기야. 그걸 결정하는 건 너야.]
[……. …같이, 가줄래?]
[아주 나중이면 좋겠다고 생각은 하지만, 응. 기다릴게…….]
더운 피가 도는 심장같은 사랑이었습니다.
"……네!"
눈물로 젖어 볼품없어진 얼굴로 클리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을 따라가기로 한 결심이 용케 허락받은 느낌이었다. 얼마나 먼 길이라도, 이 생을 깎아서 가고 싶었다.
언젠가의 이야기. 사람은 죽어 천국이란 곳을 간다고 했다. 저는 가지 못하겠네요. 조금 슬프게 어깨를 늘어뜨린 나를 안아주시며, 당신은 그렇지 않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마음이 있는 존재라면 다 갈 수 있다고 하셨지요. 제 마음은, 그곳의 황금 문을 열 열쇠가 될 수 있을까요….
영상의 아오바 씨는 언제부턴가 울고 있었다. 눈물이 떨어지고, 쥔 주먹이 떨리지만 그래도 입은 웃고 있었다. 온 힘을 다하고 있었다. 반짝거리는 것. 상냥한 사람.
[클리어….]
온 힘을 다해 노력하고 있는 저 어깨를 당장이라도 안아 다독여주고 싶었다. 아오바가 영상밖의 자신에게 뻗듯 손을 내밀었다. 클리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어린 아이처럼 두 팔을 벌렸다. 사랑으로 터질 것 같았다. 멈췄던 눈물이 터지고, 영상속의 당신과 나는 스쳐 지나갔다.
[변함없이 사랑해……. 네가 자랑스러우니까.]
다급하게 고개를 돌려 다시 아오바 쪽으로 향했다. 거품처럼 부서지지 않게 거리를 둔 상태에서 멈췄다. 아오바 씨가 또 한번 웃는다. 마른 가지에 핀 꽃 같았다.
[그러니까, 넌 절대 너를 원망하지마. 너는 내 보물이었어.]
눈이 부시듯이 행복했다.
먼 곳에서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이미 떠나보낸 것들을 떠올리던 와중, 클리어는 아주 작은 발소리가 도토리 떨어지듯 도도독 달려오는 것을 알아챘다.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알았다. 올메이트는 주인을 닮는다고 했던가. 렌 씨도 아오바 씨 처럼 참 고집스러워요. 그 점을 좋아했죠.
아니, 그 점도 좋아했죠.
클리어는 부스스 일어나서 비닐 우산으로 머리 위를 가리고, 아오바의 무덤 옆에 앉았다. 방금까지 차가웠던 자리가 한없이 따뜻하게 여겨졌다. 젖은 숨을 애써 삼키며, 클리어가 웃는 얼굴에서 멈춘 아오바의 영상을 향해 웃어보였다. 그리고 볼을 흙에 기대고는 얌전히 눈을 감았다. 젖은 볼에 흙이 달라붙는 것이 느껴졌지만 오히려 기쁘게 느껴졌다.
아오바는 마지막의 마지막, [사랑해줘서 고마워. 그리고, 태어나줘서 고마워.] 하고 말했다.
아오바 씨, 지금 갈게요.
저야말로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만들어져서,
아니, 제가 태어난 것에 대해……. 기쁘게 생각할 수 있게 만들어주셔서, 감사해요.
기계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겪어온 제 생일을 새롭게 받아 들였다. 당신의 뒤를 따른다고 생각하니 모든 것이 자랑스럽게 여겨졌다. 영상 장치는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종료되는 일회용이었지만, 제 안에 새겨진 메모리엔 영원히 남을 테였다. 마지막처럼 길게 숨을 삼키고 뱉는 것과 동시에, 클리어는 잠들듯 모든 회로를 꺼뜨렸다. 당신에게 바치는 두번째 죽음이었다. 사랑으로 가득한 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