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아오] 마주보기까지 걸린 시간
*리커넥트 밍크 루트 클리어 기념! 해피 루트 관련입니다. (네타 있습니다)
뭔가를 떠나보낸 적이 있는 이라면 알 것이다. 이미 버리고, 바라지 않기로 결심한 이상 그것은 더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흘려보낸 것은 흘려보내는 것으로 끝난 일이었다. 제대로 비워낼 수만 있다면 미련도 아쉬움도 생기지 않았다. 서럽지도 않았다. 슬프지도 않고, 아프지도 않았다.
심장이 뜨거워지는 법을 잊는다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제 자신을 썩둑 잘라버리는 것. 누군가는 그걸,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다.
"……이제와서, ……."
그렇다면 자신은 이미 한 번은 죽어 넘겼다. 달라질 것은 없다.
밍크는 아오바를 자신의 집에 둔 채 숲을 빠져나갔다. 바스락거리는 풀소리, 아직도 길게 남은 검은 그을음따위가 시야에 들어왔다가 지나쳤다. 밍크는 거친 땅 위에서도 가볍게 걸었다. 두꺼운 나무뿌리가 앞에 있어도 걸음이 느려지지가 않았다. 그 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보호받을 수 있는 장소를, 사람들은 '고향'이라 불렀다. 이윽고 숲을 빠져나오자 멀리까지 보이는 벌판에 들어섰다. 뚜벅이던 걸음이 멈추고 그가 우뚝 섰다. 답답하게 새어나오는 숨이 길었다.
바로 그때, 날개가 퍼득이는 소리는 빠르게 지나가는 바람소리와도 같았다. 머리 위에서 푸드덕거리던 소리가 가까워진다 싶더니, 밍크의 어깨 위에 무게가 실렸다. 루라칸이 고개 숙여 잠시 깃털을 솎다가 부리를 짤깍거렸다.
[안 그런 척해도 안색이 피곤해 보이던데. 무리는 아니지.]
"……."
[미도리지마에서 이곳은 지구 반대편에 가깝지 않은가?]
"……."
[기특하다고 해야할지, 생각이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있냐고 해야할지. 잘 모르겠는걸.]
"어이."
[모두 너를 만나기 위해서, 라는 거겠지.]
"…너. 말이 많아."
밍크는 인상을 찌푸렸다. 굳이 헤집어 듣고 싶은 내용은 아니었다. 잔뜩 비맞은 것처럼 흐려진 표정을 한 아오바와, 눈을 마주치며 강하게 말을 꺼내는 아오바의 모습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의 색은 너무나 진하고 생생했다. 그럴 필요까지 있냐고 물어보고 싶을 정도로, 솔직하고, 물렀고, 온기가 감돌았다.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짜증스럽게 고개를 반대로 돌리고 손으로 어깨를 탁 털었다. 용케도 직감했는지 루라칸이 그 전에 하늘로 훌쩍 날아올랐다. 새로 맞춰준 몸이 예전보다 가뿐하긴 한 모양이었다. 머리 위에서 원을 그리며 날던 루라칸이 천천히 한 자리에 멈춰 날았다. 이제야 조용해졌다.
"……."
생각할 것이 많다. 그가 한 손으로 눈가를 꾹 눌렀다. 미뤄두고 있던 피로감이 한꺼번에 몰아닥치는 기분이었다. …결국, 제대로 잘라내지 못한 건 자신이라는 걸까?
ㅡ
용서라는 것은 그리 쉽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비우는 것보다 더 어렵다면 어렵지. 입었던 상처를 몇 번이든 되짚으며, 상대를 알려는 노력이 필요했다. 흘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흐르는 물에 깨끗하게 씻겨보내야 하기 때문에 손도 많이 가는 작업이 분명했다. 그걸 위해서는 더 많이 아파야 하고, 더 많이 울어야 했다.
"……."
세라가키 아오바는, 자신의 눈으로 볼때엔 턱없이 부러지기 쉬워보이던 그는, 그 모든 것을 해냈다고 하는걸까?
"…밍크."
……그저 겉만 그럴싸하게 꾸려놓고 올바른 자신의 모습에 심취하고 싶은 게 아닐까? 이렇게 먼 거리를 오는데엔 비용도 체력도 많이 썼을 게 분명했다. 밍크는 분명, 아오바가 자신을 쫓고 있다는 걸 알고는 꽤 자주 자리를 피했다. 바로 모습을 감추지 못했던 이유는 스스로도 모르겠다. 잠시 그를 생각하고, 과거를 되짚을 때면 소년이 성큼 다가와 뒤에 섰고, 그림자가 밟히기 전 자신은 앞으로 나아갔다. 이러기를 몇 번. 지치면 돌아가겠지, 포기하겠지하는 생각이었다. 사람의 피가 바짝 마를 때엔 파단도 성급해지기 마련이었다. 밍크는 조용히 그의 발소리가 거둬질 것을 기다렸다.
하지만 점점더, 그는 다가왔고 제 곁에 섰다. 빗물에 옷자락이 쓸리는 듯 조용하지만 분명한 흔적이 제 몸에 배였다.
"나는……."
"……."
너에게는 꽃내음도, 과일향도 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그쪽으로 기울어져갔다. 밍크는 일부러 아오바의 시선을 피했다. 외면하고, 아닌 척 가장하는 일은 이제 진력이 날 정도로 익숙한 일이었다.
"밍크, 내 말, 듣고 있…. ……밍크……."
그늘에 쳐박혀 시들어가는 음성이었다. 밍크는 마시던 것도 제대로 못 마신 채, 컵을 그대로 두고 그 자리를 떠났다. 놀란 얼굴이 망막에 달라붙어 떨어지질 않았다.
"…제발. ……."
한숨처럼 섞인 목소리는 작아서 들리지도 않았다. 차라리 잘못 들은 것이라 생각하고 싶었다. 그대로 방문을 세게 닫고는 등을 기댔다. 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고착 상태였다. 앞으로 나아갈수도, 뒤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자신이 그에게 한 짓은 본인이 스스로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한번, 자신이 그때로 돌아가도 달라질 것 없다는 것 또한 알았다. 그 점이 제일 힘들었다. 떠나보냈던 것들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미련같은 것은 없는 생이었음이 분명했는데, 뭔가가 억지로 휘어지는 느낌이 익숙해지지 못하고……, 그래. 불쾌했다.
[커피. 마시고 싶어했던 것 아니었나? 그대로 남겨두고 왔군.]
루라칸이 평온한 어투로 지껄였다. 밍크는 대답하지 않았다.
ㅡ
남자는 이런 저런 생각할 것 없이 솔직하게 부딫쳐오는 것에 약한 구석이 있었다. 맑게 잘그락거리는 소리가 약 한달째 끊임없이 이어졌다. 일렁이는 촛불은 무른 듯 하지만 의외로 단단한 구석이 있었다. 어둠속에서도 희미하게, 계속해서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작지만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계속해서 들렸다.
…….
…….
…….
내 생각이 틀렸다. 그에게는 꽃내음, 과일향이 풍겼다. 물소리가 나고 샘처럼 고여있는 것. 그가 웃으면 하늘처럼 맑았고, 울면 별이 내렸다. 이젠 인정해야만 했다. 그에겐 자잘한 흠이 많아 보였지만 그건 단면이 많은 것 뿐이므로, 빛이 닿으면 영롱하게 반짝거렸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자 닿았다. 손가락 끝으로 더듬자 아오바가 몸을 움츠렸다. 잔잔한 물 위를 더듬으려 들듯, 밍크는 아오바를 손끝으로 살피려했다. 아오바가 용기내듯 밍크의 손목을 잡아왔다. 부드럽고, 따뜻한 체온에 무언가가 녹아내렸다. 아, 밍크는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얇은 나비 날개처럼 눈 앞에 펼쳐지는 광경이 꿈만 같았다.
널 몰아세운 건 언제나 나였다. 이제 그 책임을 져야겠다고 생각했다.
ㅡ
[이젠 아주 이쪽 사람처럼 보이는걸. 길이 잘 든 모양이지]
"음?"
[아오바 얘기다.]
"아아."
…원래 어린 것은 습득하는 게 빨라. 하고 답하자 루라칸이 짧게 웃었다. 성년의 나이를 넘긴게 분명한 그를 두고 어리다고 표현하는 건 자신이 생각해도 이치에 맞는 일이 아니긴 했다. 그래도 꿋꿋히 입을 다문 밍크가 그의 연인에게 건넬 것들을 다시 한 번 확인하듯 늘어놓았다. 곱게 개어놓은 옷가지들과 뒷덜미에 솔솔 뿌려주면 오래가는 향가루, 그리고 깃털로 만들어진 머리 장신구 따위였다.
이른 새벽에 밖을 다녀온다고 몸이 차가웠지만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조상들과 가족. 일족을 생각하면 오히려 가슴 안 쪽이 더 서늘하게 식었다. 사랑하는 것들. 다정하고,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들이여. 제 손에 무언가를 쥐어도 되겠습니까…. 밍크가 창밖을 힐끗 쳐다보았다. 아오바가 일어나기엔 너무 이른 시간이긴 했다. 이제 그는 방으로 들어가 그를 깨우고, 단장시킬 생각이었다. 마음을 언어로 하나하나 표현하는 것 보다 더 강렬한, 순간을 공유할 생각이었다. 오늘. 그는 해가 떠오르는 때에, 지금은 자신밖에 모를 일족의 관습대로 돌처럼 단단한 맹세를 연인에게 바칠 것이다.
[서둘러야겠군.]
느긋하게 말하는 루라칸의 말에 대답은 하지 않았다. 밍크는 다시금 옷가지와 물건들을 챙겨 들었다. 안겨줄 것이 이리도 많다. 앞으로도, 그 이후에도, 언제나. 그는 자신이 줄 수 있는 것, 주고 싶은 것은 모두 소년에게 쥐여줄 것이라 다짐했다. 세간에서는 감히 그것을 사랑이라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