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립미즈] Who is He?
*늦은 제아의 생축기념 트립미즈!
*게임 본편의, 아오바에게 정체를 들키지 않은 우이토리네와 무사히 퇴원을 마친 미즈키! 라는 설정입니다!
욕실에서는, 작은 소리여도 웅웅거리듯 울렸다. 닫힌 문 안에서 더운 물의 열기따위에 표면이 흐려지듯 모든 것이 번지고, 퍼졌다. 아…. 미즈키는 숨마저 약하게 쉬었다. 조금만 있으면 바라던대로 온 몸이 뭉그러지듯 힘을 모두 뺄 수 있는 순간이었다. 아주 고통스럽고, 싫고, 무섭지만 이제야 쉴 수 있다는 것만으로 모든 걸 포기하고 내던질 수 있었다. 그에겐 책임질 것도 많았지만 이제 와서는 다 쓸데없는 소리다. 잔뜩 지친 사람은 채 울지도 못한다. 미즈키의 눈가는 이미 짓물려져 앞도 보이지 않는 사람 같았다. 몸을 푹 담근 욕조의 물이 붉게 출렁거렸다. 아, 이제 조금만 더…. 흐물텅거리는 몸은 이윽고 머리를 지탱할 힘이 없는 어린 아이처럼 고개를 앞으로 푹 거꾸러 뜨린다. 뜨거운 물에 코가 처박힌 때 였다.
"아아."
문이 거칠게 열리는 소리가 멀게도 들렸다. 쾅, 쾅, 하던 소리가 환청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큰 걸음으로 성큼성큼 다가온 그가 거칠게 제 어깨를 움켜잡고 몸을 들어 올렸다. 미즈키는 떨리는 숨만 비명처럼 내쉬었다. 이제 저항할 힘도 없었다. 미즈키는 남자가 화가 난 나머지 자신의 목을 비틀어 쥐어줬으면 좋겠노라고, 가물가물 생각했다.
"트립은 뭔가 기르는 데엔 소질이 없으니까 말이야."
"……."
애초에 욕조 그 자체의 용도는 무시한 채 저지른 일이었으므로 미즈키는 흰 셔츠에 바지 차림이었다. 그가 골랐다기엔 조금 큰 셔츠. 짐승의 냄새가 나는.
어깨를 붙든 남자는 다른 손으로 미즈키의 입가를 옆으로 주욱 당겼다. 마치 기르던 개의 이빨이라도 확인하는 듯한 태도였다. 쿨럭, 하는 소리와 함께 입가에 거품이 흘렀다. 남자는 하, 짧게 웃었다.
"바이러스. 도와줘."
"게우는 거 먼저 시켜야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응, 그거 하고 나서."
미즈키의 턱가를 꾹 쥔 손이 떨어지며, 그의 고개가 다시 푹 떨어졌다. 너덜하게 잘린 손목의 통증이 새삼스럽게 타오르듯 아파왔다. 사실, 반동강이 나야할 때까지 베어야 죽을 수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너무 아팠다. 잘 잘리지 않았다. 스스로 자르는 건 너무 어려웠다. 아파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큭, 흐…. 미즈키가 몸을 떨며 울었다. 결국 도망치지 못했다.
트립이 미즈키의 핏물이 섞인 물에 아무렇지도 않게 발을 넣었다. 첨벙, 첨벙. 물 장난을 하는 소리가 나고, 미즈키는 걸쳐진 빨랫줄처럼 몸을 앞으로 고꾸라 뜨렸다.
"자, 미즈키. 이제 아ㅡ할 시간이야."
트립은 뒤에서 미즈키의 허리를 끌어안고, 욕조 밖으로 미즈키의 고개를 숙이게 한 후에 손가락을 제멋대로 그 입 안에 욱여넣었다. 그 입술에 손끝이 닿은 순간부터 싫었다. 미즈키는 제 허리에 놓여진 남자의 손등을 긁을 힘도 없었다. 이제 감각을 잃은 혀는 그저 존재하는 살덩이였다. 억지로 벌려져서, 들쑤셔졌다. 미즈키의 아래로 내려간 시야엔 두 사람의 무게를 이겨내지 못하고 출렁거리는 욕조물이 개수구로 빨려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가 희뿌얘졌다. 억지로 물 밖에 내어진 물고기의 살이 생으로 잘라내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욱, 컥, 미즈키가 몸을 떨었다. 남자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 점이 무서웠다.
"크, 헉,"
"으음."
"…! 웩, 우욱, 웨, 거억!"
번거롭다는 듯 힘으로 꾹 눌러오는 터에 결국 그는 삼켰던 알약을 토해냈다. 하얀 타원형의 알약이 위액에 녹아 물렁물렁해진 채로 바닥을 굴렀다. 붉고, 하얗고, 투명했다. 트립은 제 손가락에 끈끈한 액체가 눌러 붙어도 더럽다는 인식을 못하는 듯 했다. 그저 꿋꿋이, 미즈키의 속을 비워내는 일을 했다. 얼마나 삼켰는지 뱃속에 찬 것이 많기도 했다. 욕실의 문가에 기대서서 그 꼴을 보고 있던 바이러스가 작게 감탄할 정도였다.
"죽, 주……."
"응, 안 들려, 미즈키."
"시…, 어……."
"안 들린다니까."
미즈키는 자신이 우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후륵, 바이러스가 마지막으로 남은 제 커피를 아주 맛있게 마셨다. 다음엔 설탕을 더 넣어도 괜찮을 것 같은걸. 그가 말했다.
"……."
누군가가 웃었다. 아마 바이러스이리라. 미즈키는 이제 구분할 힘이 없었다. 지독했다. 미즈키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모르지만 알 수 밖에 없었다. 혼란스러운 와중,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미즈키 씨."
바이러스가 미즈키의 앞에서 무릎을 쪼그리고 앉았다. 다시 한 번 들고 있던 찻잔을 물던 바이러스가 태평하게 아차, 다 마셨던 걸 깜빡했네요. 하고 지껄였다. 미즈키는 대답하지 않았다.
"오늘도 사랑받아서 좋겠네요."
아.
…결국 오늘도 도망치지 못했다.
ㅡ
미즈키가 최근 레시피를 바꾼 모양이야, 하고 코우자쿠가 말하기 전엔 아무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서비스로 앞에 놓여진 과일 접시에서 막 사과를 집어 들어 입에 물던 아오바가 우응? 하고, 대답한 듯 만 듯 하는 소리를 냈다.
"하하, 방금 뭐야? 무슨 소리였어?"
"! …아니, 누가 딱 입에 넣을 때 말 걸래?"
은연중에 어린아이 같은 짓을 했다는 걸 자각했는지 아오바가 바락바락 반박하는 모습에 코우자쿠는 배를 잡고 웃었다. 그리고는 다시 한 번, 친절하게 한 말을 반복해 주었다.
"제조하는 술의 레시피가 조금 바뀐 것 같다고."
"어…. 그런가?"
"아주 미묘해서 그냥 내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맛이 조금 달라."
"그런가……?"
"으음, 아오바. ……네가 그런 반응이니까 괜히 나도 헷갈리잖아?"
"뭐야. 그냥 코우자쿠의 착각 아냐?"
으으음, 그런가? 코우자쿠는 한 손으로 턱을 괴며 인상을 묘하게 찌푸렸다. 아오바는 그 모습을 보다가 고개를 들어 저 건너편에서 주문을 받고 있는 제 친우를 쳐다 보았다. 아오바는 그에게 지은 죄가 있었다. 자신과 마주치지 않았으면 평온했을 그 세계를 한 번 부쉈던 적이 있었던 것이다. 검은 눈가를 하고 음산하게 웃던 그 이미지를 떠올리며, 아오바는 태연한 척 사과를 마저 입에 물었다. 어떤 의미에서 아오바는 이제 미즈키에 관해선 조심스러워 질 수 밖에 없겠다.
"…네 착각일거야."
"흐음."
"미즈키는, 이제 아무 문제 없으니까……."
"…그래."
아오바가 금방 사그라드는 것을 빠르게 감지한 코우자쿠가 이번에도 뜻을 그에게 맞춰주었다. 두어번 고개를 끄덕인 그가 입을 잠시 다물었다. 갑작스럽고도 길었던 입원을 그도 잊을리는 없었다. 용케 회복해서 돌아왔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이제 더한 불행은 없을거라 생각하고 싶었다. 어쨌거나, 정말 착각일 뿐이었다. 심지어 정말이라고 해도 상관 없었다. 고작 레시피, 술을 섞는 배합이 달라진 것 뿐인걸.
"~어이, 미즈키! 여기 주문!"
모든 게 평온하고 아무 문제 없었다. 그들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코우자쿠의 목소리에 미즈키가 그들 쪽으로 몸을 돌렸다. 네, 갑니다요~! 하고 웃는 얼굴은 여전히 티없이 맑았다. 길쭉한 메뉴판을 들고 건네오는 그 손목엔 못보던 검은 아대가 있었다. 그냥 기분 전환으로 한 거겠지. 아오바와 코우자쿠는 그들쪽으로 다가오는 소중한 친우에게 활짝 웃어주었다.
ㅡ
'그 일'이 있고 나서도 몇 개월이 지났다. 몇 일도, 몇 주일도 아닌 몇 개월. 그쯤이면 되었겠지. 하고 뚜껑을 덮고 새로운 일에 몰두하는 시간.
"……."
미즈키는 하얀 천장을 올려다보며, 자신이 언제부터 여기에 왔는지. 왜 있는지. 뭘 하고 있었는지를…….
"미즈키."
……떠올리지 못한다.
"미즈키, 자?"
"……."
그는 대답을 바라지도 않는 주제에 종종 이렇게 말을 걸어왔다. 그냥 내키는대로만 하는 남자였다. 사람보다는 다른 것에 가까운 게 아닐까…. 한껏 시달린 몸으로 내린 결론이란 그런거였다. 미즈키는 나른한 시선으로 옆을 보았다. 가라앉은 금발. 눈에 번지는 살색. 사람의 체온이란 질릴 정도로 뜨거웠다. 사내의 냄새도 이젠 지긋지긋하다.
지긋지긋……?
미즈키가 제 생각의 오류를 알아채기도 전에, 남자가 이불을 걷고 꾸역꾸역 곁으로 기어 들어왔다.
"오늘은 자고 가."
"……?"
"내일 데려다 줄테니까…. 아니면 가게는 그냥 쉬던가."
"어……."
자연스럽게, 남자는 제 옆에 앉아 자신을 품으로 폭 끌어안았다. 미즈키는 흐늘거리는 시선으로 어떻게든 생각의 끈을 잡아보려고 애썼다. 보이는 건 있는데 잘 연결이 되지 않았다. 남자는 미즈키의 머리에 볼을 부비며 만족스러운 숨을 쉬었다. 뭔가 이상했다. 미즈키는, 남자의 이름을 불러보기로 했다. 할 수 있는 건 사실 그것밖에 없었다.
"……트립?"
"어라…. 정신 들어버렸어?"
"왜, 여기. 난……."
"점점 주기가 짧아지는 것 같은데……. 바이러스 말대로 면역이 생겨버린건가."
"뭐……?"
"아아. 자려고 했는데, 귀찮아."
트립이 손끝으로 미즈키의 턱가를 쓸었다. 느긋했지만 상냥하지는 않았다. ? 미즈키는 왜 자신이 공포를 느끼는 지에 대해서 빨리 추측해내지 못했다.
그런고로, 제 목이 졸리고 있다는 것 또한 늦게 알아챘다. 방금까지만해도 늘어져 있던 것이 거짓말처럼 트립이 재빨리 몸을 일으켜 미즈키의 몸위로 훌쩍 내려 앉았다. 갑작스럽게 꽉 막히는 숨에 미즈키가 눈을 부릅떴다. 퍼뜩, 긴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몸이 움직여졌으나 트립은 가뿐하게 잡아 눌리고 불편한 기색으로 미즈키를 내려다 보았다.
아.
미즈키는 엉망으로 꼬인 머릿속으로 자신이 모르던 어떤 기억이 떠오르고 있음을 느꼈다. 싫었다. 멍청하고 보기 싫을 정도로 한심하게 추락한 자신이 울고 애원하고 있었다. 제발 그만둬 달라고, 그런 말이 스멀 스멀 기어 올라왔다.
아아?
"미즈키."
목울대를 질근히 누르자 턱이 절로 젖혀지며 기침이 나왔다. 트립의 손아귀 힘은 반칙이라도 쓴 것처럼 강했다. 미즈키가 본능적으로 사내의 손을 치워내려고 두 손을 든 순간, 트립이 미즈키의 얼굴을 세게 내려쳤다.
"컥!?"
"착하지이."
"…그만! 아, …쿨럭, 숨, 막……."
"으응. 알아."
한 대 맞은 것만으로도 머리가 울렸다. 무슨 약이라도 먹은 게 아닐까? 싶을 때였다. 다시 한 번 트립이 한쪽 손을 올렸다. 미즈키는 본능적으로 눈을 감았다.
따악.
손가락으로 맞부딫쳐 나는 소리가 났다.
"어……?"
몸에 힘이 풀렸고, 그걸 자각하기도 전에 트립이 미즈키의 오른쪽 눈거풀 위에 쪽, 입을 맞췄다. 그가 이런 가벼운 애정 표현을 할 수 있을리가 없었다. 어디선가 보고 왔던 것을 떠올려냈거나, 그저 변덕의 변덕에 불과할 것이었다. 트립이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혼자는 외롭지."
그리고 놀랍게도, 스위치가 내려갔다. 그대로 암전.
ㅡ
"왜 하필 저거야?"
"응?"
기절한 남자는 미동도 없이 늘어져 있었다. 개에게나 걸어주는 목걸이를 목에 걸어주며 트립이 고개를 기웃거렸다. 바이러스가 허리에 두 손을 얹고 그 풍경을 무감하게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트립은 잠시 생각하다가 목줄을 바이러스에게 맡기곤, 서랍에서 뭔가를 꺼냈다.
"아오바 씨는 그럴 가치가 있다고 쳐도."
"아오바는 특별하지."
"이건 그냥 지나가다 흔히 발에 채이는 종류잖아."
"뭐, 그렇긴 한데."
트립이 미즈키의 곁에 앉더니 꺼내온 매직펜을 손으로 휙 돌렸다. 꽤나 멋드러진 동작이었지만 바이러스는 영 알 수 없다는 표정만 할 뿐이었다. 트립은 그 시선이 재밌다는 듯 웃었다.
"부서졌는데 다시 붙었잖아."
"한 번 부서진건 원래대로 못 돌아가. 멀쩡해 보이겠지만, 이미 금간 건 여전할걸."
"그게 좋아."
붉은 매직펜으로, 트립은 미즈키의 볼에 하트를 그렸다. 눈물이 흐르는 듯한 마크가 없는 쪽의 볼이었다. 그냥 어릿광대의 꼴이 따로 없네. 바이러스가 목줄의 끝을 시선으로 더듬다가 그만두었다.
"하긴, 넌 팔팔한 걸 좋아하니까. 오래 기르기엔 그게 제일이지."
"뭐, 아마도 말이야."
"응?"
괴롭게 찡그린 표정을 내려다 보던 트립이 다시 펜뚜껑을 열었다. 이번엔 빈 하트의 내부에 색을 칠해주려는 모양이었다.
"다르게 부숴보고 싶은지도 모르고."
"……."
"어쩌면 그냥 손에 잡혀서 데려온 걸지도 모르고."
"……."
"우리 말 한 마디에 질질 울고 그러면서, 밖에선 잘 웃잖아."
아. 하트 밖으로 선이 삐져 나갔어.
"그게 보고 있으면……."
날개도 그려줄까?
"재밌어."
모르히네처럼.
슥스윽 그리는데 재미를 붙여버렸는지 한참을 쏘샥거리고 있는 트립의 넓은 등을 한심하게 보던 바이러스가 목줄의 끈을 바닥에 놓아버렸다. 어차피 오늘은 밤 내내 깰 일 없을 테였다.
"그러고보니 그거 지워지는 종류야?"
"아. 확인했어야 했는데."
"됐어. 난 가서 잘래."
"응, 잘 자. 바이러스."
남자는 이제부터 무슨 일을 당하게 될까? 트립의 방에 하룻밤을 보낸다는 것은 꽤나 위험한 짓이었다. 바이러스는 수많은 가능성을 가늠해보다가 그냥 웃는 것으로 모든 것을 끝냈다.
"미즈키 씨도 잘 자요."
대답이 없을 것을 알아도 인사는 한다. 그들은 예의를 아는 짐승들이었다.
ㅡ
"미즈키."
"미즈키, 자?"
"미즈키~"
"음, 재미 없어지면 어떡하지?"
"미즈키. 일어나면 안되는 거 알지?"
"백을 셀테니까 그 안에 숨 멈추고 죽어버리면 이제 그만 가지고 놀게."
"시작한다?"
"하나,"
"둘,"
"그리고……."
"하하, 실패했네. 유감. 또 도망 못 갔어."
"역시, 그거지? 혼자는 싫구나."
ㅡ
토우에는 무너지고, 그간 쌓아왔던 그의 계획들도 도미노처럼 무너졌다. 바이러스와 트립은 영리하게 잘 빠져나온데다가, 그의 유산이라 할 만한건 거진 챙겨 나왔다. 어차피 충성심도 없는 관계였다. 그들은 이번에야말로 진짜 야쿠자처럼 소리없이 골목 어둠속으로 스며 들어갔다. 어차피 기억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잠시 몸을 숨기고 상황을 살펴봤으나 이름도 얼굴도 갈아야 할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 굳이 외국으로 떠나야 하는 것도 아닌데다가, 사람을 앞두고 모든 거짓말과 술수를 다 부릴 자신이 있었으니 그들이 남기로 한 건 당연한 걸지도 몰랐다.
그냥, 눈에 띄는 일은 그만 두고 자숙하고 있기로 했었지. 바이러스가 호출할 때까지 대기해야 한다는 별 웃기지도 않는 역을 떠맡은 트립은 상당히 불만스러운 얼굴로 골목 벽에 기대고 앉아 풍선껌이나 질겅거리고 있었다. 바이러스는 능숙한 데 비해 트립은 풍선불기에 약했다. 대체 어떻게 하는거지? 혀를 말거나, 껌을 납작하게 누르거나, 그런 짓이나 하고 있을 때였다.
"…어……."
"음?"
바쁜 걸음으로 골목 안으로 들어오던 누군가가 자신을 보자 멈칫, 하고 걸음을 멈췄다. 있을 법한 일이긴 했다. 이런 곳에 사람 하나가 쪼그려 박혀 있으면 좀 그렇지. 트립은 그저 말없이 상대가 지나가길 기다리며 발밑만 쳐다보았다. 그때 까지만해도 전혀 몰랐다. 트립은 관심있는 것에만 기억력이 좋았을 뿐이었으니까. 한번 본 적이 있던 발등과 신발코라는 걸 알아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미즈키는 이때 그냥 지나칠 수 있었다. 차라리 그랬으면 좋았을 테였다.
"저……."
"……?"
"그,"
트립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상대를 올려다 보았다. 막 들어오는 골목의 입구에 남자가 서있었다. 역광이다보니 눈이 부셔 절로 눈이 찌푸려졌는데, 오해했는지 상대는 잠시 입을 우물거리며 말을 고르는 듯 했다.
"그러니까…, …아오바의 친구지?"
트립은 무심코,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자신이 상대를 알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오바의 팬인데."
이름은 까먹었지만, 별로 기억할 가치가 없는 시시한 남자였다고 기억한다. 음, 그래도 다른 부하들과 비교해보면 꽤 건강한 정신 세계긴 했지만 결국은 지배 당해 헤롱거리기만 하던 허수아비였다. 그에겐 그때의 기억이 남아 있지도 않았을거고, 갑자기 무의식적인 혐오감에 달려든다고 해도 몸으로 제압할 자신은 있었다. 트립이 느긋하게 입 안에 퍼져있는 껌을 혀로 정리할 때였다. 남자가 우물쭈물하다가 짧게 웃었다. 보통 이럴 때 웃던가? 트립은 바이러스의 경우를 떠올려 보다가 그만 두었다. 바이러스는 너무나 체계적으로 '필요할 때'만 골라 웃었다. 다른 타인은 종종 '필요 없을 때'도 웃는데 불구하고.
"여기서 뭐해?"
"아무것도…. 지나가는 길에 방해되면 일어서 줄까?"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늘 둘이 다니는 것 같다가 혼자 보이길래 신기해서."
"흐음."
트립은 입을 다물었고, 대화가 엉성하게 끊긴 나머지 분위기도 서먹해졌다. 어, 음. 그러니까……. 먼저 말을 건 게 자신이라는 자각은 있는지 미즈키가 한참을 안절부절 못하다가 다시 웃는 얼굴로 말을 꺼냈다. 참 포기를 모르는 인종이었다.
"아오바의 친구며 내 친구도 되니까 말이야! …가끔 보기도 하고."
"구역이 맞닿으니까. 야쿠자 일을 하다보면 어쩔 수 없지."
"…뭐, 딱히 그쪽에 편견을 가지고 있진 않아."
"아오바도 그래."
남자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공통 화제가 잡히자 그제야 안도하는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다음엔……. 순찰말고 손님으로 오면 대접해줄테니까."
"돈은 내야 하는 거잖아?"
"그, 야…. 그때가서 보자고!"
"헤에."
트립은 미즈키를 보는 듯 마는 듯 하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손을 털었다. 바짝 아래로 향해 있던 미즈키의 시선도 트립을 따라 위로 올라왔다. 살짝 삐딱하게 선 자세로 트립이 웃었다.
"그래. 그때가서 보자고."
조금 재밌었다. 자신을 보며 모든 욕을 다하던 사람이, 그때는 까맣게 잊고 겁도 없이 다가와 손을 내밀고 있었다. 미즈키는 트립의 웃는 얼굴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갈 곳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 그, 같이 다니는 친구랑 같이 오고.
"왜?"
"음? 뭐가…?"
"왜 굳이 같이 가야하는데?"
"아니……."
그제서야 미즈키는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제서야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미즈키는 표면이 완만한 사람이었지만, 그런 사람치고는 특이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굴곡이 있거나 구부러진 존재를 너무도 잘 읽었다. 어떻게 대답하는 게 좋을지 한참을 생각하던 그가 박수를 짝 치고는, 꽤나 괜찮은 말을 떠올라서 자랑스럽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거야, 혼자는 외로우니까!"
ㅡ
미즈키의 살 냄새. 그리고 또 웃는 표정. 우는 표정. 찡그린 표정. 힘들어 하는 표정. 모든 게 섞여서 핏물처럼 바닥을 적셨다. 트립은 그 풍경을 인상깊게 기억해버렸다. 꾸역꾸역 토해지는 흰 알약과 회오리치는 붉은 물결. 축 늘어진 남자의 몸. 몇 번이나 품에 안고 때리고 적셔도 마법의 주문 하나면 모두 '없었던 일'로 되어버리는 편리한 상대.
이상하게도 잠이 오지 않았다. 트립은 한참을 천장을 보며 뒹굴거리다가 미즈키를 향해 몸을 돌려 누웠다. 가끔은 흥미가 생겨서, '사랑한다'고 말하게도 해보았다. 아양떨게도 만들어 보았고, 바닥을 기며 애원하게도 만들었다. 앞으로 더 뭘 시킬 수 있을까?
트립은 사냥감을 보듯이 남자를 보았다. 바이러스는 가능하면 오늘 밤만이라도 남자를 가만히 내버려 두라고 했지만, 참을 수가 없었다. 어차피 바이러스에게도 이 남자가 중요하지 않을테니 그냥 내가 부숴도 되지 않을까.
바이러스는 휘파람을 잘 불었다. 그러니 휘파람 한 번과, 어떤 말을 들려주면 미즈키는 바로 백지 상태가 되었다. 트립의 손은 크고 둔탁했지만 그 덕분에 딱, 따악. 하고 내는 소리가 컸다. 그것과 어떤 말을 들려주면 미즈키는 바로 스위치 꺼진 방 안에 갇히게 되었다. 처음 구호를 정하자고 나섰을 때, 제가 말한 말에 바이러스가 지었던 표정은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이었다.
왜 하필 그 말이야? 하고 물었었던가.
내가 절대 하지 않을 것 같은 말이라서. 하고 대답했고, 납득시켰다. 그리고 바이러스도, 결코 자신이 하지 않을 것 같은 말을 골랐다. 조금 악취미라고 생각한다.
트립은 천천히 미즈키의 귓가에 손을 가져다 댔다. 이제 딱, 소리를 내고 그 말을 들으면 다시 깨어난다. 이번엔 뭘 시키지. 방금까지는 연인처럼 굴었으니 이번엔 그가 자신을 아주 무서운 어떤 것으로 생각하게 만들까? 아니면, 스스로를 생각하지 못하는 곰인형 따위로 인지시키는 것도 재밌겠다.
눈도 깜짝하지 않는 그 짧은 시간. 트립은 집중하며 손을 튕겼다. 그냥 그때 그때 떠올리는 걸로 해보기로 했다.
따악.
또 한 번 남자의 내면에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미즈키."
이제 조금만 더 하면 부서질까?
"내가 지금부터, 하는 말을 잘 기억해두고 깨어나면 얘기해줘."
아니면…, 그냥 이대로 영영 살게 될까?
"트립, 나는 너무 행복해. 하고 말해야 해. 알았지?"
가르쳐줄거지?
어느새 몸을 일으켜 앉은 트립이 미즈키의 심장께에 손을 올렸다. 도근, 도근, 오늘도 살아 있었다.
"…혼자는 외롭지."
한 켠이 찢겨나가듯 또 한번 기억을 부서뜨리며, 트립이 부드럽게 손가락으로 미즈키의 몸을 두드렸다. 이런 식으로 눈을 뜨는 미즈키의 눈은 얇은 막에 한 겹 감싸여진 것처럼 시선이 탁해서, 그게 퍽이나 귀여웠다. 파르르 떨리는 눈거풀이 소리없이 떠졌다. 식어가는 환자처럼 입가가 움칫거렸다. 트립이 표정까지 세세하게 지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웃어 주지는 않았다. 트립은 기꺼이 고개 숙여 미즈키가 하는 말에 귀기울여 주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자신은 상냥한 구석이 있었다.
트립.
나는 너무 행복해.